윗 줄 맨 왼 편이 나의 엄마다.
외할머니는 상주 오대에서 큰 외삼촌과 엄마를 낳았다.
외할아버지가 문경 점촌의 '문경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 외할머니는 홀로 어린 두 남매를 길렀다.
큰 아들이 네댓 살쯤 되었을 무렵, 외할머니는 점촌으로 나왔다.
엄마 말씀에 따르면, 큰 외삼촌 위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생후 일곱 달 만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상심은 매우 깊어, 장남이 된 큰 아들에게 사랑을 온전히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 그늘진 마음은 큰 외삼촌을 늘 주눅 들게 했고, 평생 크고 작은 열등감의 노예가 되었다.
국민학교만 졸업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외할머니는 장남만큼은 반드시 서울대에 보내겠다는 집념이 무서웠다.
이린 아들을 데리고 외할머니는 홀로 상경해, 국민학교 시절부터 큰아들을 서울 학교에 보냈다.
혜화동, 명륜동, 답십리... 학교 근처를 전전하며 삯바느질과 점방일, 가리지 않는 허드렛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아들을 우겨 키웠다.
값비싼 과외를 붙여 억지로 공부를 밀어 넣었으나, 끝내 오른 곳은 중앙대 기계공학과.
외조부모의 통한으로 남았고, 큰 외삼촌은 그것을 석고대죄의 업보로 여겨 평생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큰 외삼촌은 소심하고, 눈치를 심하게 보는 성격 탓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고, 십 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외조부모의 첫 번째 아픈 손가락이었다.
외조부모의 무거운 기대와, 편향된 사랑을 짊어진 육 남매의 첫째.
예민하고 엄격한 부모 밑에서 항상 마음밭이 짓눌려 있었다.
엄마가 항시 안쓰러워하던 '오빠'.
엄마의 형제는 첫째, 막내아들을 빼면, 가운데 네 딸은 하나같이 예민하고 자존심이 쎘다.
서로 말을 매우 아꼈다.
남에게 피해 한 톨 주기 싫어하는 각자가 만나면, 몇 마디 안 나누고도 상처를 입었고 다투지 않아도 마음은 더 꼭꼭 닫힌 채 토라져 흩어졌다.
형제들이 모이는 명절 때마다 큰 외삼촌은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이는 드물었다. 외숙모는 남편을 무시했고, 자식들의 태도도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야. 다른 어른들보다 더 깍듯하게 인사드려야 한다."
그러나 엄마의 말과 행동은 자주 어긋났다.
당신은 독특한 바로 밑의 맹랑한 여동생과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렸다.
엄마와 외삼촌은 정치적 성향에서도, 삶의 가치관에서도 극명히 대립했다.
작은 말끝마다 두 사람의 언쟁이 계속되었는데, 세 살 터울의 남매는 서로 물러섬이 드물었고, 라운드가 시작되면 하나 둘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언제나 끝은 "그래. 현ㅇ 너 잘 났다. 천 년 만 년 너 잘난 맛에 살아라" 식이었다.
24년 1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첫째와 둘째는 영정 사진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 엄마 사진 앞에서 자꾸 방귀를 뀌면 어떡해?"
"야. 잘난 현ㅇ야, 너는 똥 안 싸냐?, 똥 싸기 전에 방귀 안 뀌냐?"
두 분 모두 날이 무뎌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매섭던 모서리를 깎아내고, 서로의 상처를 둥글게 흘려보내준다.
25년 5월, 큰외삼촌이 세상을 떠났다.
오래 암을 앓았고, 복수에 물이 찼다.
엄마는 참아온 한 마디를 뱉으며 눈을 훔쳤다.
"참 애썼다.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