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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다른 태국> 대반전 리듬

방콕 | 5

by 강라마

방콕에 처음 도착한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길을 멈추게 되는 거리, 카오산로드.

10여 년 전 내가 처음 태국을 찾았을 때도 이곳은 가장 인상적인 장소 중 하나였다.

눈부신 네온사인, 끝없이 이어지는 음악,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배낭여행자들의 얼굴.

하지만 그 열기 속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이 거리는 원래부터 이렇게 여행자들의 무대였을까?

여기서부터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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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카오산(ข้าวสาร)은 본래 ‘벗겨낸 쌀’을 뜻한다. 라마 5세 시대, 이곳은 쌀을 거래하던 방콕의 중심지였다.

방람푸 운하를 따라 가마니가 실려 나르고,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이 골목에 집결했다.

당시의 카오산은 지금의 파티와 여행이 아니라, 도시의 밥줄을 쥔 경제의 심장이었다.

나는 골목 모퉁이에 서서 옛 지도를 떠올려 본다.

사원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사이로 무거운 쌀자루가 부딪히던 소리.

화려한 네온사인 대신 흙먼지와 상인의 고함이 이곳의 공기를 채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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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20세기 후반,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태국은 새로운 얼굴을 맞았다.

방콕은 전쟁의 피해를 직접 겪지 않은 안전한 도시였고, 자유를 찾아 동남아를 떠돌던 젊은 여행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저렴한 숙소, 조용한 골목, 사찰이 가까운 입지. 그 조건은 배낭여행자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쌀가마니 대신 배낭이 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환전소, 여권 사진관, 작은 게스트하우스가 하나둘 생겨났고, 카오산은 어느새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의 기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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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론리 플래닛》 가이드북이 카오산을 소개하면서 세계 여행자들의 지도에 이 골목이 찍혔다.

이어서 2000년, 미국의 작가 수전 올리언이 카오산을 “사라지기에 좋은 거리(The place to disappear)”라 부른 순간, 이 작은 골목은 단숨에 세계적인 성지가 되었다.

낯선 도시에서 흔적 없이 묻혀들 수 있는 곳. 그 표현은 수많은 배낭여행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고 영화 The Beach.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장면 속, 주인공이 머물던 방콕의 거리 역시 카오산이었다. 영화는 이곳을 “세계를 떠도는 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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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그러나 카오산의 함성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리듬이 흐른다.

람부뜨리 거리. ‘라마의 딸’이라는 뜻을 가진 이 이름은 과거 다리와 운하의 흔적에서 비롯되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왕실에 바칠 비단을 짜던 직조 공방들이 늘어서 있던 자리였다.

왕의 옷을 만들던 장인들의 베틀 소리가 울리던 골목은 지금 노천 카페와 나무 터널로 바뀌었다.

낮에는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흘러내리고, 밤이 되면 어쿠스틱 음악과 오색 등이 골목을 물들인다.

카오산이 폭발하는 젊음의 무대라면, 람부뜨리는 그 무대를 바라보는 낭만의 객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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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코로나 이후 몇몇 가게가 문을 닫았고 풍경은 달라졌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카페와 상점들이 문을 열며 거리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밤의 카오산을 걷다가도 종종 람부뜨리로 발길을 옮긴다.

한쪽에서는 음악과 군중이 몸을 흔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무 터널 아래 고요가 흐른다.

두 거리는 전혀 다르지만, 그 차이가 방콕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카오산은 여전히 세계 여행자의 관문이고, 람부뜨리는 그 관문을 비켜 서 있는 숨결이다.

쌀을 나르던 운하의 기억, 자유를 꿈꾸던 여행자의 발걸음,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낮과 밤의 리듬.

그 모든 것이 겹쳐져, 이곳은 오늘도 또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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