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 20
방콕에서 커피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사실 한 가지 질문부터 떠올리게 된다.
태국에서 커피는 처음부터 카페 문화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방콕에는 수천 개의 카페가 있지만 태국에서 커피는 오랫동안 도시 생활의 중심 음료가 아니었다.
과거 태국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마시던 것은 커피보다 다른 음료들이었다.
예를 들어 허브차, 국화차, 과일 음료, 코코넛 음료, 사탕수수 주스 같은 것들이다.
열대 기후의 태국에서는 이런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들이 일상적인 갈증을 해소하는 방식이었다.
커피는 이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음료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도시 음료에 가까웠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방콕은 빠르게 성장하는 항구 도시가 된다.
이 시기 태국에는 대규모의 중국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특히 상인, 노동자, 음식 장사꾼들이 많았다.
이들은 차이나타운과 항구 주변에서 수많은 노점과 식당을 운영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커피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커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카페 커피와는 조금 달랐다.
에스프레소 머신도 없었고 바리스타라는 개념도 없었다.
대신 천으로 만든 필터, 큰 주전자, 연유 통 이 세 가지가 있었다.
이 방식으로 만든 커피는 진하고 거칠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설탕과 연유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 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 보란(กาแฟโบราณ)의 시작이었다.
카페 보란이 달콤한 이유는 단순히 취향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동남아시아의 기후와 유통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 동남아시아에서는 신선한 우유를 보관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냉장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우유 대신 연유(condensed milk)가 널리 사용됐다.
연유는 상온 보관이 가능하고 단맛이 강하며 커피의 쓴맛을 부드럽게 만든다.
그래서 태국뿐 아니라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같은 지역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커피가 등장했다.
이 문화 속에서 태국의 커피는 점점 달콤하고 진한 음료로 발전했다.
내가 찾아간 곳은 SNS에서 종종 등장하는 작은 가게였다.
이름은 Auntie Nid Red Lips Coffee(ร้านป้านิดปากแดง กาแฟโบราณ)
방콕 올드타운 사오칭차 근처 조용한 골목에 있다.
처음 도착해서 가게 앞에 섰을 때 이미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태국인 사이에서도 유명하지만 중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 오는 곳이 되었다.
가게 앞에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 몇 개가 놓여 있고 벽에는 오래된 메뉴판이 붙어 있다.
화려한 에스프레소 머신도 세련된 인테리어도 없다.
대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스테인리스 주전자, 천으로 만든 커피 필터 그리고 여러 개의 연유 통이다.
이 가게의 메뉴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네스카페
카페 보란
코코아
오발틴
차 마나우
가격은 모두 40바트.
요즘 방콕 카페 가격과 비교하면 마치 다른 시대의 가격처럼 느껴진다.
이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빠 닛(ป้านิด)”라고 부르는 할머니였다.
태국에서 “빠(ป้า)”라는 말은 원래는 이모를 뜻하는 말이지만 일상에서는 나이가 있는 여성을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손님들은 대부분 이 가게를 “빠 닛 커피”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가게에는 또 하나의 이름이 붙어 있다. “빡 댕(ปากแดง)” 직역하면 “붉은 입”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가게 이름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단순히 “빠 닛 커피”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손님들이 그녀를 “빠 닛 빡 댕” (붉은 입의 닛 이모) 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 별명이 결국 가게 이름이 되었다.
이 별명은 아주머니의 독특한 모습에서 시작됐다.
짙은 붉은 립스틱.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색이다.
그녀가 이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20년 전이라고 한다.
커피 가게를 운영한 시간은 이미 40년이 넘었지만 이 강렬한 스타일은 생각보다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너무 피곤하고 생기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뜨거운 가스 불 앞에서 하루 종일 커피를 만들다 보면 얼굴이 쉽게 지쳐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날 가장 밝은 붉은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내가 생기가 있어야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느냐.”
그 생각이 이 가게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붉은 입술은 또 다른 태국 문화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태국에는 요일마다 행운의 색이 있다는 문화가 있다.
월요일은 노란색, 화요일은 분홍색, 금요일은 파란색 이런 식이다.
빠 닛은 그날의 행운 색에 맞춰 옷, 귀걸이, 액세서리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골 손님들은 그녀의 옷 색을 보면 “오늘은 월요일이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작은 변화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빠 닛이 건강하게 가게에 나왔다는 신호.
최근 몇 년 사이 이 가게는 SNS에서 크게 유명해졌다.
젊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이 골목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커피를 주문해 보면 이곳의 방식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빠 닛은 천 필터에 커피 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 커피를 추출한다.
컵 바닥에는 연유를 먼저 넣는다. 그리고 커피를 붓고 얼음을 넣어 섞는다. 몇 초면 끝난다.
동작은 빠르고 마치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처럼 자연스럽다.
커피는 달고 진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인상적인 것은 맛보다 이 작은 공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다.
아마 한 세기 전 방콕의 골목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커피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태국 커피 역사에는 골목 커피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왕이 만든 카페다.
20세기 초 라마 6세 국왕은 방콕 두싯 지역에 수아파 공원(Wild Tiger Park) 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은 시민들이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공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원의 한쪽에 작은 카페가 세워졌다.
그 이름이 바로 카페 드 노라싱(Café de Norasingha)이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카페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콘크리트 파빌리온 형태의 건물에 4~5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커피, 차, 간단한 음식, 디저트를 즐길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카페가 왕실 전용 공간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이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는 점이다.
당시 방콕에는 이런 형태의 카페가 거의 없었다.
커피를 마시는 공간은 대부분 호텔이나 외국인 클럽이었다.
그래서 카페 드 노라싱(Café de Norasingha)은 태국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등장한 서양식 카페 문화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이곳은 결국 문을 닫게 된다.
오늘날 이 이름은 다시 등장한다.
파야타이 궁전 안에 있는 카페, 카페 드 노라싱(Café de Norasingha)이다.
태국 최초의 카페 이름을 계승한 공간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높은 천장과 장식적인 벽, 그리고 오래된 계산기가 놓여 있다.
유럽풍 장식과 태국식 건축이 묘하게 섞여 있다.
이곳은 단순한 카페라기보다 태국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상했던 “새로운 도시 공간”을 보여주는 장소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태국 커피 문화의 출발점은 사실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 이민자들이 만든 길거리 커피 문화 다른 하나는 왕이 만든 서양식 카페 문화이다.
이 두 흐름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세계처럼 존재했다.
골목에서는 달콤한 커피가 팔렸고 궁전 근처에서는 서양식 카페가 등장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 문화가 서로 섞이기 시작한다.
오늘날 방콕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골목에서는 여전히 카페 보란이 팔리고 도시 곳곳에서는 스페셜티 커피 카페가 등장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1970년대 태국 북부에서 시작된 커피 재배 프로젝트도 있다.
라마 9세 국왕이 추진한 로열 프로젝트를 통해 북부 고산족들이 양귀비 대신 아라비카 커피 재배가 확대되면서 태국에서도 좋은 커피 원두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의 태국 커피는 길거리의 달콤한 커피, 서양식 카페 문화, 현대 스페셜티 커피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독특한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태국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음료를 주문하는 일이 아니다.
골목의 작은 가게에서 천 필터로 내린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궁전 근처의 오래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이 두 장면 사이 어딘가에 태국 커피의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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