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아술린 『가스통 갈리마르: 프랑스 출판의 반세기』(2005)
셀 수 없이 많은 책을 펴낸 이가 있다. '세바스티앙 보땅 가(rue Sébastien-Bottin)'라 불리던 파리의 어느 골목에서 그는 매일 아침 편지를 썼다. 받는 이의 대부분은 작가 아니면 작가지망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의 글을 갈리마르에서 출판해도 되겠습니까?
이 책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출판사 중 하나인 갈리마르 출판사의 창업자 가스통 갈리마르(Gaston Gallimard, 1881-1975)의 일생을 다룬 전기이다. 저자인 피에르 아술린(Pierre Assouline, 1953-)은 가스통의 일대기뿐 아니라 당대 프랑스 출판계의 상황, 갈리마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출판사들, 다수의 작가들을 포함하는 방대한 내용을 책에 담고 있다. 실재했던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만큼 그의 문장들은 생기가 넘친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 아술린은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여 가스통의 아버지인 폴 갈리마르를 소개한다. 폴은 그 유명한 공쿠르 형제와 친분이 있어 그들의 책을 소량으로 제작하여 소장했다. 공쿠르 형제가 1865년에 쓴 소설인 『제르미니 라세르퇴Germinie Lacerteux』를 호화 판본으로 딱 세 부만 제작하여 본인과 공쿠르 형제, 서문을 써준 비평가 귀스타브 조프루아(Gustave Geffroy, 1855-1926)만 소장한 것이다. 그는 또한 인상파 화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와도 친한 사이였으며, 화가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던 외젠 카리에르(Eugène Carrière, 1849-1906)는 어린 시절의 갈리마르와 그의 두 동생을 그려주기도 했다. 장차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가스통 갈리마르와 견주어 볼 때 별 거 없어 보이는 아마추어 예술 애호가였던 아버지였지만, 글의 서두에 짧게 언급되는 그의 일화들은 내게 긴 전기를 읽고 나서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내가 19세기의 역사를 무엇보다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량이었던 가스통이 그 많은 사업 중에서도 출판업에 몸담게 되는 계기 중 하나에 그의 아버지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공쿠르 형제와 르누아르의 친구인 아버지라니!
어벤저스 같은 독자위원회
가스통이 1911년에 출판업에 뛰어들어 1975년의 크리스마스에 눈을 감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를 거쳐간 작가들 중에는 프랑스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책에는 가스통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베르나르 그라세(Bernard Grasset, 1881-1955)라는 출판인이 등장하는데, 그라세는 자신의 탁월한 감각으로 좋은 글을 판별하는데 비해 가스통은 출판사 내에 '독자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글을 심사하도록 했다.
"독자위원회는 갈리마르 형제가 함께 사용하던 사무실에 모였다. 매주 화요일 같은 시간에, 독자들은 가스통과 레몽의 좌우로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모두가 거의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 명씩 읽은 원고에 대해 의견을 말했다. 발표시간은 짧았다.(중략) 그들은 학교에서처럼 원고에 점수를 매겼다. 점수는 1점부터 4점까지였다. 1은 원고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간혹 별표를 덧붙이는 독자위원들도 있었다. 별표는 독자위원들끼리 사용하던 비공식적인 암호로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었다."(117-118쪽)
11명 정도로 이루어진 독자 위원회의 위원들은 주로 작가이거나 문학을 전공한 이들이었다. 그 중 장 폴랑(Jean Paulhan, 1884-1968)은 1920년에 입사하여 1968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갈리마르 출판사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예민할 것 같은 얼굴의 폴랑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갈리마르의 본인 사무실에서 대놓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가스통은 그것을 눈감아주곤 했다. 폴랑 외에도 독자위원회에는 유태인 작가였으나 안타깝게도 2차 대전 때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뱅자맹 크레미외(Benjamin Crémieux, 1888-1944)나, 갈리마르에 독일 문학을 소개했던 베르나르 그뢰튀장(Bernard Groethuysen, 1880-1946), 러시아 문학을 담당했던 브리스 파랭(Brice Parain, 1897-1971) 등이 있었다. 이들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독자위원회의 중심이었으며, 갈리마르 출판사의 화려한 도서목록을 책임졌다.
집념의 사업가
내가 가스통에 감명받았던 점은 그의 끊임없는 집념이었다. 뛰어난 역량을 가진 작가들이 갈리마르에서 책을 출판하도록 하는 것. 가스통은 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삶을 운행하는 사람 같았다. 사실 가스통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불운한 세대였다. 그러나 이 전쟁들로 인해 가스통의 집념은 더욱 강고해졌고, 그 덕에 갈리마르 출판사는 나날이 성장한다.
"두 전쟁 사이에, 가스통 갈리마르는 실패를 피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뛰어난 작가와 작품이 그의 품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이름들을 기억에 새겨두고 '잃어버린 양'이라 생각하며,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다시 끌어왔다.(중략)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1914년까지 출판사들이 불문율처럼 지키던 예절과 페어플레이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중략) 특히 그라세와 갈리마르 간의 경쟁은 참호전을 방불케 했다. 어떤 수법도 허용되었다. 비열한 수법도 상관없었다."(186쪽)
실제로 가스통은 탁월한 능력과 잠재력을 지닌 작가들을 잡아두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는 작가들이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안정된 일자리를 구해주었다. 알베르 카뮈와 같은 인기작가의 경우, 갈리마르 출판사 내에 테라스가 있는 사무실까지 제공받았다. 가스통은 갈리마르 출판사가 운영하는 일간지나 잡지를 만들어 작가들이 글을 기고함으로써 고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런 신문이나 잡지는 갈리마르에서 펴낸 책들을 홍보하는 매체의 역할도 담당했다. 가스통이 출판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던 <신 프랑스 평론(Nouvelle Revue Française, NRF)>이나, 고품격 문학주간지 <마리안느(Marianne)>, 주로 잡다한 사건들을 다뤘던 <데텍티브(Détective)> 등이 그런 역할을 도맡아 했다.
가스통은 갈리마르 출판사에 첫 번째 공쿠르 상을 안겨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임종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가스통과 프루스트의 첫 만남부터, 프루스트의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과오를 범한 후 프루스트의 마음을 되돌리려 노력했던 가스통과 <신 프랑스 평론>의 작가들까지, 프루스트와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1922년 11월, 파리. 가스통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침대맡에 있었다. 그는 레날도 안, 폴 모랑 등 몇몇 친구들과 프루스트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뒤누아 에 드 세공자크를 불러왔다. 그는 붓과 먹, 스케치북을 가져왔다. 그는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죽음을 맞고 있는 프루스트의 초상화를 그렸다.(중략) 콕토는 도착하자마자 가스통을 붙잡고 다음 책, 『사기꾼 토마(Thomas l’imposteur)』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시신에서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임종의 자리에서 거래가 성사되었다."(137-138쪽)
가스통은 작가의 임종 자리에서까지 출판 거래를 성공시키는 끈질긴 집념을 보여준다. 정녕 가스통은 집념의 사업가였다!
점령된 파리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가스통의 집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가스통은 점령 기간에도 파리에서 출판사업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전쟁 초기에 책은 잘 팔려나갔다. "영화와 연극의 관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독일 점정 시기에는 책이 왕이었다. 또한 라디오 파리, BBC와 같은 라디오 방송은 프로그램도 재밌지 않았고 정치색이 지나치게 강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책을 더욱 즐겨 찾았다. 파리에서나 지방에서 책이 지루함과 박탈감과 우울을 이겨내는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진 덕분에, 종이 공급이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출판사들은 원만하게 사업을 꾸려나갔다."(303-304쪽) 가스통은 오직 출판사업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살롱을 번질나게 드나들며 대독 협력자들과 그들의 주인들을 만났다. 그곳에 권력(검열, 종이 배급, 통행권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가스통을 평가한다면, 그는 사익을 위해 국가를 배반한 독일의 협력자이며, 매국노일지도 모른다. 아술린이 가감 없이 적고 있는 그의 행적들은 실제로 그러해보인다. 그러나 나는 가스통이 독일에 협력한 것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온전히 그의 집념 때문이라 생각한다. 가스통은 파시스트였던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도,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폴랑도, 그리고 전쟁 기간에도 생업을 이어가야 했던 작가들 모두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에 협력한 이들에 대한 숙청의 작업이 있었을 때 많은 작가들은 가스통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를 보호했다. 단적인 예로, '콩바(Combat)'라는 레지스탕스 조직의 일원이었던 알베르 카뮈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43년과 1944년, 갈리마르에 있던 내 사무실은 내가 관계를 맺고 있던 '콩바' 조직원들에게는 만남의 장소였다. 그 조직의 상세한 활동까지는 몰랐겠지만 가스통 갈리마르는 그 조직의 존재를 알았고, 그 점에서 나를 언제나 보호해 주었다." 많은 작가들의 변호 덕분에 가스통은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갈리마르 출판사는 20세기 프랑스 문학사와 지성사를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출판사로 거듭났다. 앙드레 지드(André Gide, 1869-1951)부터 프루스트,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카뮈 등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는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자신들의 저작을 출간했다. 거대 출판 기업의 대표가 된 가스통은 훗날 귀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도 화요일 오후 5시에 열리는 독자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말끔히 차려입은 노신사는 좋은 글을 발굴하고 갈리마르의 이름으로 펴내기 위해 살아온 자신의 집념을 생의 마지막 날까지 놓지 않았다. 재밌는 건, 그는 훈장이나 허례허식을 극도로 싫어했다는 사실이다. 1947년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동생인 레몽 갈리마르(Raymond Gallimard, 1883-1966)에게 양보했다. 또 폴랑이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에는 화를 금치 못했다. 그는 오직 책을 사랑했고, 작가들을 사랑했다. 그 어느 출판사보다 좋은 책을 펴내는 곳, 갈리마르 출판사의 대표 그것으로 충분했다.
갈리마르 서점(Librairie Gallimard)
파리의 갈리마르 서점의 간판에는, 서점이라는 의미의 'Librairie'라는 단어 아래 이탤릭체로 'depuis 1919'라고 적혀있다. 프랑스어로 ‘1919년부터‘라는 뜻이다. 가스통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변화와 도약의 필요성을 느끼고 1919년에 주식회사인 ‘리브레리 갈리마르(librairie Gallimard)’를 세웠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간판에 가스통 갈리마르의 흔적이 남아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