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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Jul 07. 2024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

브로샤이 『피카소와의 대화』 정수경 옮김 에코리브르 (2003)

여러 번 가봤어도 겨울의 파리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 겨울의 파리는 내게 미지의 세계다. 이 책은 주로 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에 점령된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나는 읽는 내내 겨울의 파리가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에 이르곤 했다. 어깨를 움츠린 채 센 강변을 걷는 이들,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음, 부족한 식량과 일상이 된 허기, 집 안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추위까지.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무기력은 당시 파리에 머물렀던 이들의 영혼에 무거운 혹처럼 달려있었을 것 같다. 더구나 이 책의 저자인 브라사이는 자국의 소집명령을 어긴 채 몰래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헝가리 태생의 사진작가였다. 그의 극한 상황은 책에서 얼핏 생략이 되어있는 것 같지만, 나는 여러 짧은 언급들로 그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피카소의 집

(피카소가) 1940년 8월 25일 수도 파리로 돌아왔다. 점령당한 파리에서의 생활은 피카소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자동차 휘발유와 작업실 난방에 쓸 석탄도 없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도 이 혹독한 전쟁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줄을 섰고, 라보티에 가에서 그랑 오귀스탱 가까지 드문드문 다니는 만원 버스나 지하철을 타야 했다. 심지어는 목적지까지 걸어서 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화기애애하고 난방이 잘 된 플로르 카페에서 거의 매일 그를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마치 자신의 집에서처럼, 아니 집에서보다도 더 좋아 보였다. 나도 가끔씩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센 강의 좌안과 우안을 오가는 일이 지겨워진 그는, 1942년에 결국 그랑 오귀스탱 가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86-87쪽)    

 

브라사이는 피카소의 조각 작업 전체를 사진으로 기록하여 출판하는 일로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의 피카소의 집에 드나들게 된다. 브라사이가 피카소를 알게 되었을 당시 피카소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1932년 브라사이가 피카소를 찍은 사진을 보면, 피카소의 눈빛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런 피카소가 보는 앞에서 그의 조각들 하나하나를 찍어야 했다니, 상상만으로도 나는 심장이 떨린다.

브라사이가 라 보에티에 가 23번지에 있던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피카소 뒤로 루소의 그림이 보인다.)

그러나 책을 읽어갈수록 나는 점차 피카소와 친근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브라사이와 피카소의 어색했던 사이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하루는 브라사이가 사진을 찍다가 <양을 안은 남자(L'homme au mouton)>라는 피카소의 조각에서 양의 다리 부분을 부러뜨리는 일이 있었다.

     

조각에서 떠나기 전에 나는, 재미있는 각도를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조각을 돌려놓으려 했다. 조각을 다시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90도쯤 돌렸을 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조각이 떨어지면서 받침대 위에 있던 양의 다리 중 하나, 그러니까 앞쪽으로 과감하게 나와 있던 바로 그 다리가 산산조각 났다.(중략)

결국 나는 피카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그는 소리치지도, 비난을 퍼붓지도 않았다. 나는 ‘미노토르’의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도 보지 못했다. 이것은 나쁜 징조일까? 그의 차가운 분노, 그의 집중된 광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창백함이 즉석에서 터지는 분노보다 더 위험하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를 따라오더니 기술자나 전문가처럼 깨진 조각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없어진 조각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못과 균열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내게 말했다.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홈이 충분히 깊지 않았습니다. 며칠 내로 다시 한 번 손을 보려 했는데...”(160-161쪽)


브라사이는 피카소가 화를 낼까 봐 걱정했지만, 피카소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대신 이 일을 20년이 지난 후까지도 놀려먹었다.      


브라사이가 본 피카소

피카소는 좋아하는 책을 암기할 정도로 반복하여 읽었고, 한밤중에 많은 양의 책을 읽곤 했다. 그 중 좋아하는 책의 표지에는 직접 그림을 그려넣어 그것을 유일한 창조물로 바꿔놓았다. 피카소는 친구이면서 배우였던 장 마레가 연극에 쓸 지팡이를 하룻밤 사이에 멋지게 꾸며달라는 부탁은 들어주었지만, 벽화와 같이 기한이 있는 공적 주문은 기피했다. 피카소는 두아니에 루소 같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을 다수 사들였던 수집가였으며, 동물을 무척 좋아해서 어딜 가나 그의 곁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그는 특히 책상 서랍 속에 흰쥐를 키웠다. 점령된 파리에서 피카소는 반려견 카즈벡과 노트르담 근처로 자주 산책을 나갔다. 브라사이의 친구였던 어느 무명 화가는 파리의 풍경을 그리다가 뒤를 봤는데, 피카소가 자신이 그리는 것을 보고 있는 걸 알고 식은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렸다고 털어놓았다. 피카소는 집에 돌아와서 그 풍경 화가를 원숭이로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 초안, 메모까지도 모두 버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쌓아놓았다. 브라사이와 과거의 조각 작품들까지 찾아내어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은 피카소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식으로 자신의 작품들이 출판된 책을 본 후 피카소의 반응은 매우 당황스럽다.    

 

“하지만 여기에 실린 이 그림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다른 작품을 만들었죠! 그리고 이것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달라졌는데... 여기에 보이는 이 두상은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정물화에 있는 단지는 그 사이 부엉이가 됐죠. 저는 지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예전 그림들을 고치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 사진들은 이제 유령의 그림으로만 존재하죠.”(385-386쪽)   

 

끊임없는 호기심, 끊임없는 작업과 수정, 끊임없는 완성과 미완성... 피카소의 힘은 이런 패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건대, 나는 결국 피카소의 매력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브라사이의 의도였을까.


피카소의 오랜 친구, 사바르테스

브라사이가 피카소의 집에 드나들면서 필연적으로 친해질 수밖에 없던 이들이 있다. 피카소의 오랜 친구이면서 비서와 같은 역할을 했던 사바르테스와 운전기사 마르셀, 가정부 이네스다. 그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가장 끌었던 인물은 사바르테스였다. 사바르테스는 피카소의 예술작업을 제외하고 피카소의 모든 일을 관장하던 존재였다. 당시 피카소의 집은 일종의 만남의 광장이었고, 피카소의 인기는 종전 이후 더욱 높아져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는 그야말로 핫플이 되었다. 이렇게 몰려드는 인파의 교통정리는 사바르테스의 몫이었고, 그는 냉정한 태도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오직 피카소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냉정함은 그가 농담을 할 때에도 이어졌기 때문에 가끔 브라사이를 혼돈에 빠트리기도 했다.     


나는 사바르테스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이 심술궂은 사람과 같이 있으며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그는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속임수는 그의 제2의 천성이 되었다. 농담할 때나 큰 재앙을 알릴 때나 그는 늘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242쪽)

브라사이가 찍은 사바르테스의 초상 사진

브라사이가 찍은 사진을 보면, 그가 묘사했던 사바르테스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문 입술과 진지한 두 눈이 고집 있어 보이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면 영원히 사랑할 것 같은 노인이다. 20여 년 후인 1962년에 브라사이가 다시 사바르테스를 만났을 때, 사바르테스는 뇌출혈로 인해 몸의 한쪽이 거의 마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르셀로나에 피카소 미술관이 생기게 되는 것에 행복해하며 브라사이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눈다.


“그랑 오귀스탱의 작업실에 있던 생쥐들이 어떻게 피카소의 데생은 그냥 놔두고 당신의 데생만 갉아먹었는지 아십니까?”

이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피카소의 생쥐는 결코 내 데생을 갉아먹은 일이 없었다. 그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440쪽)


피카소와의 대화

브라사이의 글들은 유난히 대화가 많아 있었던 일들을 그날그날 적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대화들을 다 기억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녹음을 한 것은 아닐 테니 완벽한 기록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날그날의 분위기를 마치 가까이 있던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 시대의 추위까지도 말이다. 가짜 체류증을 가진 도망자 신세였던 브라사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어떤 계기 때문이었을까? 브라사이는 피카소가 지녔던 특유의 힘으로부터 어둡고 추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겨울의 파리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꽤 오랫동안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에 머물렀던 것 같다. 피카소와 그의 작품들을 관찰하고, 사바르테스와 농담을 하고, 계속 밀려들어오는 피카소의 ‘유명한’ 손님들을 신기해하며 그들과 한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피카소의 집 어딘가에서 조용히 조각들을 찍고 있을 브라사이도 함께 말이다.

1966년의 브라사이와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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