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리스 Jul 07. 2024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

브로샤이 『피카소와의 대화』 정수경 옮김 에코리브르 (2003)

(피카소가) 1940년 8월 25일 수도 파리로 돌아왔다. 점령당한 파리에서의 생활은 피카소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자동차 휘발유와 작업실 난방에 쓸 석탄도 없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도 이 혹독한 전쟁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줄을 섰고, 라보티에 가에서 그랑 오귀스탱 가까지 드문드문 다니는 만원 버스나 지하철을 타야 했다. 심지어는 목적지까지 걸어서 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화기애애하고 난방이 잘 된 플로르 카페에서 거의 매일 그를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마치 자신의 집에서처럼, 아니 집에서보다도 더 좋아 보였다. 나도 가끔씩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센 강의 좌안과 우안을 오가는 일이 지겨워진 그는, 1942년에 결국 그랑 오귀스탱 가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86-87쪽)    

 

저자인 브라사이(Brassaï, 1899-1984)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헝가리 정부로부터의 소집명령을 어긴 채 몰래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사진작가였다. 그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조각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맡게 되면서,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의 피카소의 집 겸 작업실에 드나들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암울한 시기에 도망자 신세였던 자신을 기꺼이 친구로 여겨준 피카소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43년 9월 초부터 시작되는 브라사이의 글은 피카소와 처음 만났던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 피카소는 이미 대단한 유명인사였다. 피카소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모든 이들에게 다정했으며, 특유의 카리스마도 놓치지 않았다. 1932년 브라사이가 찍은 사진을 보면, 피카소의 눈빛에서 강렬한 살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때도 피카소는 브라사이에게 파리 외곽의 부아줄루에 있던 자신의 조각들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었다. 사진 속의 피카소가 보는 앞에서 그의 조각들 하나하나를 찍어야 했다니. 브라사이가 얼마나 큰 부담을 느꼈을지 나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떨린다.

브라사이가 라 보에티에 가 23번지에 있던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

그러나 흥미롭게도 나는 책을 읽어갈수록 점차 피카소와 친근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브라사이와 피카소의 어색했던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하루는 브라사이가 사진을 찍다가 <양을 안은 남자(L'homme au mouton)>라는 피카소의 조각을 부러뜨리는 일이 발생한다.

     

조각에서 떠나기 전에 나는, 재미있는 각도를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조각을 돌려놓으려 했다. 조각을 다시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90도쯤 돌렸을 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조각이 떨어지면서 받침대 위에 있던 양의 다리 중 하나, 그러니까 앞쪽으로 과감하게 나와 있던 바로 그 다리가 산산조각 났다.(중략)

결국 나는 피카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그는 소리치지도, 비난을 퍼붓지도 않았다. 나는 ‘미노토르’의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도 보지 못했다. 이것은 나쁜 징조일까? 그의 차가운 분노, 그의 집중된 광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창백함이 즉석에서 터지는 분노보다 더 위험하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를 따라오더니 기술자나 전문가처럼 깨진 조각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없어진 조각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못과 균열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내게 말했다.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홈이 충분히 깊지 않았습니다. 며칠 내로 다시 한번 손을 보려 했는데...”(160-161쪽)


소심한 브라사이는 피카소가 화를 낼까 봐 걱정했지만, 피카소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대신 이 일을 20년이 지난 후까지도 놀려먹었다.


브라사이가 본 피카소

이 책은 내가 거의 처음으로 읽은 피카소에 관한 책이다. 대학원에서 현대미술사 강의를 들으며 피카소에 관한 논문을 읽어본 적은 있지만 그 논문들은 대부분 피카소의 작품에 관한 것이었지, 피카소라는 사람에 관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피카소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피카소는 내가 막연히 상상해 왔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그러나 새로 알게 된 사실도 많았다. 브라사이에 의하면, 피카소는 좋아하는 책을 암기할 정도로 반복하여 읽는 습관이 있었고, 한밤중에 많은 양의 책을 읽곤 했다. 그중 좋아하는 책의 표지에는 직접 그림을 그려 넣어 그것을 자신의 유일한 창조물로 바꾸어놓았다.(개인적으로 나는 예술가들의 이런 행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또한 피카소는 친구이면서 배우였던 장 마레가 연극에 쓸 지팡이를 하룻밤 사이에 멋지게 꾸며달라는 부탁은 선뜻 들어주었지만, 벽화든 조각이든 정해진 기한이 있는 공적 주문은 매우 귀찮아하며 기피했다. 나는 미술사에서 많은 화가나 조각가들이 자신의 경력을 위해, 아니면 큰 돈을 벌기 위해 국가나 시에서 주관하는 공공미술 작업에 참여하고자 노력했던 많은 사례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알다시피 피카소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 이미 타고난 능력을 지닌 이름난 화가였다. 피카소는 두아니에 루소와 같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다수 사들였던 수집가였으며(저 위의 사진에서 피카소의 뒤로 그가 소장했던 두아니에 루소의 그림이 보인다), 동물을 무척 좋아해서 어딜 가나 그의 곁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함께 했다.

브라사이 덕분에 나는 피카소가 독서광이었다는 사실도, 자신의 서랍 속에 흰쥐를 키웠다는 사실도, 자신의 모든 작품들과 초안, 메모까지도 모두 버리지 않고 쌓아놓는 맥시멀리스트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피카소의 오랜 친구, 사바르테스

이 책에서, 다시 말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점령된 파리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의 온기로 따뜻한 빛을 발하고 있는 장소는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인 듯하다. 브라사이가 그곳을 드나들면서 거의 매일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던 이들이 있었다. 피카소의 오랜 친구이면서 집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사바르테스와 운전기사 마르셀, 가정부 이네스다. 그중에서 나의 관심을 가장 끌었던 인물은 사바르테스였다. 사바르테스는 피카소의 예술작업을 제외하고 피카소의 모든 일을 관장하던 존재였다. 당시 피카소의 집은 일종의 만남의 광장이었고, 피카소의 인기는 종전 이후 더욱 높아져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는 그야말로 파리의 '핫플'이 되었다. 그렇게 몰려드는 인파의 교통정리는 사바르테스의 몫이었고, 그는 냉정한 태도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오직 피카소의 작업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냉정함은 그가 농담을 할 때에도 이어졌기 때문에 가끔 브라사이를 혼돈에 빠트리기도 했다.     


나는 사바르테스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이 심술궂은 사람과 같이 있으면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그는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속임수는 그의 제2의 천성이 되었다. 농담할 때나 큰 재앙을 알릴 때나 그는 늘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242쪽)

브라사이가 찍은 사바르테스의 초상 사진

브라사이가 찍은 사진을 보면, 그가 묘사했던 사바르테스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문 입술과 진지한 두 눈이 꽤나 고집 있어 보이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면 영원히 사랑할 것 같은 노인이다. 20여 년 후인 1962년에 브라사이가 다시 사바르테스를 만났을 때, 사바르테스는 뇌출혈로 인해 몸의 한쪽이 거의 마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르셀로나에 피카소 미술관이 생기게 되는 것에 행복해하며 브라사이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눈다.


“그랑 오귀스탱의 작업실에 있던 생쥐들이 어떻게 피카소의 데생은 그냥 놔두고 당신의 데생만 갉아먹었는지 아십니까?”

이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피카소의 생쥐는 결코 내 데생을 갉아먹은 일이 없었다. 그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440쪽)


피카소와의 대화

브라사이의 글들은 유난히 대화가 많아서, 있었던 일들을 그날그날 기록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가짜 체류증을 지닌 채 점령된 파리에 숨어 살다시피 했던 브라사이에게 그랑 오귀스탱 가를 오가며 피카소 가까이에서 일하게 된 건 그에게 더없이 행복한 일과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했을 터였다. 피카소와의 대화들은 그에게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순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브라사이 덕분에 나는 겨울의 파리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어깨를 움츠린 채 센 강변을 걷는 이들,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음, 부족한 식량과 일상이 된 허기, 집 안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습기 찬 추위까지. 나도 꽤 오랫동안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에 머물렀던 것 같다. 피카소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사바르테스와 농담을 나누고, 계속 밀려들어오는 피카소의 '유명한' 손님들에 연신 신기해하며 그들 모두와 한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다. 언젠가 다시 파리에 가게 된다면 그랑 오귀스탱 가 7번지를 가보고 싶다. 창문 너머로 피카소와 사바르테스, 브라사이를 상상해 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

1966년의 브라사이와 피카소



노트르담 드 파리

점령된 파리에서 피카소는 매일 반려견 카즈벡과 센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고 한다. 브라사이의 친구였던 어느 무명 화가는 센 강가에서 노트르담을 그리다가 뒤를 봤는데, 피카소가 자신이 그리는 것을 보고 있는 걸 알고 식은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정작 피카소는 집에 돌아와 그 풍경 화가를 원숭이로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왜 아마추어 화가들을 원숭이로 묘사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