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6. 2023

소원 하나를 품고 오르다

거슨세미오름과 안돌오름

제주 동부 산간지대에 자리한 송당리 마을은 신화와 오름을 따라 걷는 소원 비는 마을로 통한다. 제주 신화의 모태가 되는 금백조를 모신 본향당이 자리한 이곳엔 가 볼만한 오름들이 많다. 수많은 오름들 중 이름이 특이한 거슨세미오름과 안돌오름을 다녀왔다.      

제주는 널리 알려진 설문대할망과 자청비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살고 있는 신들의 고향이다. 그중에서도 금백조는 제주에 깃든 1만 8,000명 신들의 어머니로 꼽히는 시조 신이다. 구좌읍 송당리 마을에는 금백조를 모신 본향당이 있다. 예부터 새하얀 한지를 가슴에 품고 소원을 빈 후 신목에 걸어두는 풍습이 전해 내려온다. 소원 하나를 가슴에 품고 본향당에서 멀지 않은 거슨새미오름과 안돌오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름도 독특한 거슨세미오름

거슨세미오름은 송당리 마을을 지나 비자림로를 따라가면 쉽게 찾는다. 오름 안에 작은 샘을 갖고 있는데 물길이 한라산을 향해 거슬러 가는 것처럼 보여 거슨세미(거슬러 흐르는 샘)’이라 불린다. 정상까지 언덕진 구간이 여럿 있어 오르락내리락하며 올라야 하는데 숨이 헉헉댈 만큼 벅차진 않다. 다만 탐방로가 긴 편이라 구석구석 살피며 다녀온다면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오름 입구에는 비자나무 조림지가 있다. 인근 주민들이 비자나무 열매를 채취하기 위해 만든 작은 숲이다. 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것이 기념일마다 펼쳐지는 절도 있는 사열식을 보는 듯하다. 비자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길이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쪽은 정상까지 곧장 이어진 오솔길이고 다른 하나는 삼나무와 편백 숲길을 따라 에둘러가는 길이다. 서둘러야 할 일정이 아니라면 숲길로 가보길 권한다.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경쟁하듯 앞 다퉈 자라난 숲길은 햇빛이 들지 않을 만큼 울창하다. 짙푸른 그늘을 드리운 곳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았다. 공기에도 색이 있다면 여긴 아기 살결처럼 보드라운 여린 연둣빛이 흐르고 있을 테다. 

 

끊임없이 솟는 거슬러 흐르는 샘

정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산불감시초소다. 나무가 많은 오름들은 작은 초소를 세워 산불을 예방한다. 무성한 나무 사이로 구좌읍과 인근에 접한 조천, 성산, 표선 일대 오름들이 두루 보인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어딘가 막혀 있던 마음이 시원하게 뚫린다.  

내려오는 길에 샘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좁은 산길을 따라간 곳에 물이 고인 작은 못이 눈에 띄었다. 예전엔 여기 물을 식수와 우마용으로 썼다고 하나 지금은 새들만 날아드는 숲 속 옹달샘이 되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기에 물이 마를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는 것이 신기했다. 연못 위쪽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거슨새미가 있기 때문이리라. 깊고 좁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가느다랗게 이어지며 연못으로 향한다.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는 섬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이 서 있다. 물은 아래로 흘러가고 있지만 한라산을 향해 거슬러 가는 것도 맞는 말인 셈이다. 언제부터 샘물이 솟아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슨세미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흐를 터이다. 되돌아가는 길은 너른 들판과 나란히 걷는다. 한겨울에도 푸른 초지가 펼쳐진 광경은 언제 봐도 생경한 풍경이다.  


마른 억새가 들판을 이룬 안돌오름

거슨세미오름과 마주한 안돌오름은 높이가 93m로 낮다. 거슨세미오름에서 북쪽 출입구로 나서면 두 개 오름을 연달아 오를 수 있다. 안돌오름은 원래 돌이 많아 돌오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 근처에 비슷한 오름이 있어 한라산 안쪽에 있는 오름이라 해서 안돌이란 이름이 붙었다. 재밌는 건 안돌오름 뒤편에는 밧(밖)돌 오름이 있다. 

안돌오름은 지금도 소를 풀어 키우는 목장이 있다. 볕이 좋은 날엔 풀밭에 줄지어 가는 소 떼를 볼 수 있다. 들판 한가운데에 물을 먹이기 위해 만든 커다란 물통도 있다. 들판을 가로질러 탐방로에 오르면 양 옆으로 마른 억새들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사각사각 거린다. 가을에는 보송보송했을 억새꽃이 얇은 종이꽃처럼 바스락댄다. 쓸쓸하면서도 의연한 자태다. 정상까지 이런 풍경의 연속이다. 안돌오름은 나무들이 많지 않은 민둥산에 가까워 시야가 확 트여 있다. 다소 황량한 풍경과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모를 찬란한 슬픔이 밀려온다. 


진달래꽃밭에서 날려 보낸 소원

안돌오름 분화구는 북동쪽을 향해 터져나간 완만한 계곡 형태이며 파노라마 풍경의 정석을 보여준다. 제 자리에서 돌아도 그대로 파노라마 뷰가 완성되니 말이다. 한라산이 품은 크고 작은 오름들이 밋밋한 경관에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체오름과 높은오름, 다랑쉬오름, 동거믄이오름 등 동부 지역의 수많은 오름들이 안돌오름에 걸린 풍경화 속에 담겨 있다. 

가장 높은 북쪽 봉우리에 이르면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진달래 군락을 만날 수 있다. 며칠간 맑고 푸근한 날씨가 계속된 탓인지 벌써 만개를 이룬 진달래꽃 몇 송이가 보였다. 세상 밖이 얼마나 궁금했으면 그새 얼굴을 내민 걸까. 혹은 꽃을 피우고 싶다는 소원을 조금 일찍 이룬 것일까. 마음에 담아온 소원을 꺼내 불어오는 바람에 실어 보냈다. 봄이 되고, 진달래꽃 무리가 활짝 핀 즈음이 되면 이 소원도 이루어지겠지.      


주소 :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145(거슨세미오름) /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66-2(안돌오름)


TIP.

나만 알고 싶은 비밀의숲

안돌오름 아랫 자락에는 비밀의숲이 있다. 사진작가나 호기심 많은 여행자들이 알음알음 찾던 곳이 지금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인기 명소가 된 곳이다. 입장료가 있지만 잘 가꿔진 숲길과 사진 찍기 좋은 포토존, 화사한 유채꽃밭 등 볼거리가 많아 한번 들러 봐도 좋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2173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이전 14화 은빛 물결 일렁이는 가을 서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