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별오름과 따라비오름
섬에 가을이 오면 억새꽃들이 잔치를 벌인다.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꽃무리가 온 들녘에 퍼져나가며 은빛 물결을 퍼뜨린다.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날 바람을 타고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억새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니 보러 오라는.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지만 기다리고 있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가을 서정에 빠질 채비를 마쳤다.
살랑대는 바람에 억새 군락이 사방에서 물결친다. 가을엔 섬이 억새 군락으로 뒤덮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쪽에서는 새별오름이 으뜸이다.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온 여행자들의 기대를 가득 채워주고도 남는다.
제주 억새 여행 일번지
멀리 서 본 새별오름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동화 속 언덕처럼 보인다. 여름에 반지르르 윤기 나는 초록 빛깔 슈트를 뽐내고 나면 가을엔 복슬복슬한 은빛 털옷으로 갈아입는다. 바람이 불때마다 은빛 물결이 일렁이며 바다에 뿌려진 윤슬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새별오름을 올랐다.
새별오름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봉긋 솟아오른 거대한 언덕처럼 보인다. 멀리서는 아담해 보이지만 산체가 꽤 큰 편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름 규모에 비해 탐방로는 단순하다. 오름 자락과 맞닿은 양 끝에서 정상부까지 탐방로가 곧게 이어져 있다. 보통은 왼쪽에 남향 탐방로를 이용해 정상에 오른 뒤 반대쪽으로 내려온다.
오름 정상까지는 약 10분 정도 소요된다. 남향 탐방로를 이용하면 오름 능선을 따라 비탈진 언덕을 곧장 올라가기 때문에 한 두 번은 쉬어가야 한다. 억새가 핀 사잇길을 지나면 금세 언덕진 탐방로가 나타난다. 탐방로가 경사가 급한 편이라 노약자나 아이들은 반대쪽 북향 탐방로를 이용하면 오르기가 조금 더 수월하다. 대신 시야가 탁 트인 전망을 갖고 있다. 탐방로 부근에 나무가 별로 없는 탓이다.
잠시 걸음을 멈춘 곳에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니 주변 경치가 훤히 잡힌다. 한라산과 올망졸망해 보보이는 오름 군락, 듬성듬성 작은 숲이 형성된 들녘이 섬세하게 그려 넣은 유화처럼 단정하게 걸려 있다. 민둥산처럼 보이는 새별오름은 나무들이 무성한 숲길 대신 하늘거리는 억새꽃 무리로 가득하다.
노을까지 아름다운 풍경
정상에 내딛는 순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콧잔등에 송알송알 맺혀 있던 땀방울들을 옷소매로 훔치고 나니 더욱 상쾌한 기분이다.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한껏 피어난 억새꽃들이 흔들흔들 춤을 쳐댄다. 아래에서 볼 때는 정상부가 봉긋해 보였는데 막상 올라서니 함몰된 분화구 능선을 따라 탐방로가 이어져 있다.
새별오름은 표고가 519m에 달할 만큼 높은 고지에 위치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앞쪽에는 한라산이 우뚝 서 있고 뒤쪽으로는 비양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노을 맛집이기도 하다. 해가 질 무렵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어 바다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얼굴도 덩달아 발갛게 상기된다.
분화구 능선을 따라 난 길은 북향 탐방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쪽은 탐방로가 지그재그 형태여서 오르내리기가 편하다. 더구나 억새꽃도 훨씬 풍성하고 촘촘하게 피어나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억새꽃 군락에 햇빛이 비치면 은빛 솜털들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봄에 타오른 불꽃이 은빛 물결을 이루고
새별오름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나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 반대편을 내려다보면 키 작은 나무와 덩굴이 빽빽하게 뒤엉킨 수풀림이 형성되어 있다. 앞뒤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런 반전 같은 모습은 봄마다 열리는 들불축제 영향이 크다.
새별오름에서 개최되는 들불축제는 제주에서 가장 큰 축제 가운데 하나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오름에 들불 놓기. 전통 목축문화인 들불 놓기를 재현한 것으로 어두운 밤에 오름 사이에 횃불을 들고 다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짚불에 옮겨 붙인다.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면 미디어 파사드 쇼와 어우러져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대단한 광경을 연출한다.
들불축제가 끝나고 난 뒤엔 새별오름은 시커먼 잿더미처럼 보인다. 나무는 커녕 풀 한 포기 없는 폐허 같은 땅이 된다. 신비한 자연의 치유력은 여기서부터 발현된다. 남아 있던 것들과 바람을 타고 날아온 풀씨가 잿더미를 거름 삼아 자라기 시작하면 여름에는 금세 푸른 풀밭을 이룬다. 계절이 바뀌어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엔 어느새 훌쩍 자라난 억새꽃이 날 보러 오라며 손짓한다. 매해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자연의 생명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봄이면 붉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여름에는 푸른 융단을 깔아 놓으며, 가을이면 은빛 물결을 출렁이는 새별오름은 변신의 귀재인 것 같다.
겹겹이 둘러싼 억새의 향연 따라비오름
서쪽에 새별오름이 있다면 동쪽에는 따라비오름이 손꼽힌다. 따라비오름은 굼부리를 3개나 품은 오묘한 형태다. 중산간 마을인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해 있으며 오름까지는 외길을 따라 차로 약 5분 정도 가야 한다.
탐방로 한 쪽은 나무 계단길이고 다른 쪽은 흙길이다. 왼쪽 나무 계단을 이용해 정상에 오른 뒤 반대쪽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따라비오름은 비고가 100m 남짓한 높이로 경사가 급한 편은 아니어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은 양옆에 나무와 수풀들이 빽빽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데 집중하게 된다. 정상에선 큰사슴이오름부터 위풍당당하게 늘어선 풍력발전기들, 멀리까지 보이는 크고 작은 오름 군락들이 답답한 가슴을 확 풀어준다.
분화구에 펼쳐진 억새꽃밭
따라비오름은 하나의 큰 분화구 안에 3개의 분화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여서 각 분화구 능선을 따라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오름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오묘함이 느껴진다. 분화구 안쪽까지 내려가면 억새 꽃밭에 들어온 듯 기분이 무척 색다르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시야 덕분에 억새 군락 너머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경을 맘껏 누릴 수 있다. 억새꽃과 함께 피어난 작은 들꽃들은 또 다른 볼거리다. 눈개쑥부쟁이 등 여러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룬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키 큰 억새풀만 바라보다 허리를 굽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마음에 더 와닿았다.
가을 햇살을 맞으며 잠시 시간을 흘려보낸다. 억새풀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른한 일상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듯 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소리, 수풀소리에 취해 내려가는 걸음이 자꾸만 더뎌진다. 오름을 내려온 뒤에도 억새의 향연은 계속된다. 주변 들녘에도 억새꽃들이 가득해 가을날의 서정을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주소 :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산59-8(새별오름) /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62(따라비오름)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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