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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6. 2023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숲

삼다수숲길

오래전 말을 몰던 테우리와 사냥꾼들이 다녔던 숲길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른다. 숲이 싱그러운 건 이 때문이리라.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지금 모습처럼 맞아주기를. 꿈꾸는 기분으로 숲을 걷는다.       

제주 삼다수 수원지와 공장이 자리한 교래리 삼다수 마을에는 맑은 물만큼이나 청정한 숲이 있다. 삼다수숲길은 많이 알려지지 않아 인적이 드문 덕분인지 개장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자연미가 넘친다. 잘 관리된 탐방로와 정돈된 경관이 유명한 숲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민관이 합심해 만든 숲길

삼다수숲길은 꽃길(1.2km)과 테우리길(5.2km), 사농바치길(8.2km) 3개의 코스로 나뉜다. 꽃길은 삼다수숲길을 가볍게 산책하는 맛보기용 코스다. 테우리길은 붓순나무 군락지, 아아용암 단면, 조릿대 길과 삼나무 조림지를 차례로 둘러본다. 천천히 걸으면 2시간에서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테우리길에서 확장된 사농바치길은 노릿물과 박새 군락지까지 다녀오는 코스로 넉넉히 3시간 반 정도 잡으면 좋다. 모두 교래리 종합복지회관에서 출발해 타원형을 그리며 돌아오는 일방향 트레킹 길이다. 이중 사농바치길을 이용하면 꽃길과 테우리길의 정취까지 골고루 즐길 수 있다.

섬에 조성된 삼나무 군락지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조림되었는데 삼다수숲길 또한 40~50년 된 삼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나무들이 워낙 빽빽하게 자라 맑은 날에도 햇빛을 보기가 어렵다. 대신 한여름 무더위에 여기만큼 시원한 곳도 없다. 그늘진 때문인지 삼나무 주변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아직 남아 있는 낙엽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오로지 삼나무들만이 사는 세상을 지나면 걷기 좋은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진다. 

삼다수숲길은 마을 주민과 제주특별자치도 개발공사가 합심해 만들었다. 임도와 과거 테우리(말 몰이꾼), 사냥꾼들이 이용하던 길을 활용해 숲길을 정비했다. 여러 사람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삼다수숲길은 없었을 것이다. 숲길을 정성껏 단장해 자연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 준 이들의 마음이 고맙다. 따뜻한 마음에 보답인지 삼다수숲길은 2010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어울림상을 수상했다.      


중산간 지대에 조성된 지질트레일

수많은 나무들이 경쟁하듯 우후죽순 뻗은 자연림은 청량감이 넘친다. 무성한 수풀들이 더해져 숲 속은 온통 초록 세상이다. 숲은 붓순나무와 황칠나무 등 희귀 식물과 다양한 생물들이 공존하는 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2018년 삼다수 마을이 제주도에서 13번째로 지질공원 대표 명소로 지정되면서 삼다수숲길 또한 지질트레일이란 이름으로 재정비되었다. 그런 까닭에 숲길 곳곳에 관련 표식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워낙 탐방길이 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표식이나 노란색 국가 지점번호 안내판을 찾으면 된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 틈엔가 돌투성이 하천과 나란히 걷고 있다. 제주에서 가장 긴 하천으로 알려진 천미천이다. 한라산에서부터 흘러드는 물은 교래리와 표선면을 거쳐 남쪽 해안까지 이어진다. 평소에는 바닥이 드러나 있는 건천으로 많은 비가 내린 후에야 물이 흐른다. 하천이 말라 있을 때는 지질학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데 바닥에 형성된 크고 작은 돌개구멍도 발견할 수 있다. 자세히 살피면 용암이 흘러간 흔적도 보인다. 이곳은 점성이 높은 아아용암 지대로 암석 표면이 거친 편이다. 움푹 파인 곳마다 지난 폭우에 생긴 물웅덩이들이 남아 있어 독특한 반영을 이룬다. 구석진 곳에 작은 돌탑이 눈에 들어왔다. 간절한 마음들이 모인 곳에 내 마음도 하나 더했다.      


조릿대 오솔길과 깊어지는 숲 

멀리 있을 때는 풀밭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조릿대이다. 벼과에 속하는 작은 대나무인 조릿대는 우리나라 어느 숲에서나 보이는 흔한 식물이지만 삼다수숲길에 특히 많다. 마치 조릿대 밭에 나무들이 자란 것처럼 보인다. 잎 가장자리에 흰 띠가 둘러져 있어 풀밭에 핀 꽃 같기도 하다. 허리 높이만큼 무성하게 자란 조릿대 사이를 걷는 기분은 여느 숲길과는 다르다. 테우리길 반환점에 닿을 때까지 조릿대 오솔길이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한다. 

사농바치길로 접어들면 오래된 돌담처럼 보이는 잣성이 나타난다. 검은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은 잣성은 옛적에 말을 키우던 목장이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때 원나라가 지배하던 시기부터 섬에 대규모 목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에는 한라산 중턱에 국영 목장이 세워지고 경계를 위한 잣성이 만들어졌다. 고요한 숲에 수많은 말들이 뛰어다니거나 쉬고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가슴이 설렌다. 

숲은 더욱 깊어지고 걸음도 점점 느려진다. 수십 그루의 단풍나무가 만들어낸 풍경 앞에선 아예 걸음을 멈춰버렸다. 아기 손바닥처럼 작은 단풍잎들이 하늘을 가득 메워 초록빛 장막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 햇빛에 비친 푸른 단풍잎들이 빛나는 계절, 이 풍경 속에 있으니 가을 단풍이 전혀 그리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푸름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곶자왈부터 경찰숲터까지 

별 것도 아닌 소소한 풍경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어여쁜 구석이 하나씩은 있다. 잘려나간 나무 밑동이 별 모양인 것도 아름답고 곁가지에 돋아난 연둣빛 새 이파리도 예쁘기만 하다. 조금 호들갑을 떨면 어떠한가. 숲에서는 누구나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나이나 성별, 인종 등 모든 사회적 구분들로부터도 완벽한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자연의 품 안에 있으면 편안하고 따뜻한 위로를 받는가 보다. 일상에 쌓인 피로와 지친 마음들을 덜어내서 그런지 발걸음이 전보다 가벼워졌다. 

삼다수숲길도 곳곳에 곶자왈의 특징이 나타난다. 한데 엉켜있어 보이는 바위와 돌, 나무들이 모두 나름의 생존법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곶자왈 지대를 지날 때면 언제나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낀다. 삶이 힘겨울 때 누구는 시장을 가보라고 하지만 나는 곶자왈 숲을 추천하고 싶다. 흙 한 줌 없는 최악의 환경 조건 속에서도 굳건히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지금 내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때론 숲에서 인생을 배운다.

다소 지루한 임도 구간을 지나면 곧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지금까지 걸어온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근사한 삼나무 길이 종착점 부근까지 오랫동안 이어진다. 우람한 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서 잠시 걸음을 쉬어가 본다. 초반부의 삼나무 군락과는 또 다른 분위기이다. 이 길은 경찰숲터로 불린다. 1975년부터 제주 경찰이 오랫동안 가꿔온 특별한 숲이다. 제주 경찰청 전 직원들이 매년 나무를 심어왔으며 약 16만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삼다수숲길은 풍경만이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이처럼 여유 있는 쉼을 즐기며 걷는 것이다. 숲길을 걷는 내내 ‘더불어 사는 삶’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70-1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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