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대리 비자나무숲과 돝오름
제주도 북동쪽에는 수 천 그루의 비자나무들이 자라는 희귀한 숲이 있다. 거대한 고목들이 군락을 이룬 평대리 비자나무숲은 단일 숲으로는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사시사철 푸른 숲은 언제 찾아도 신비하고 오묘한 기운이 흐른다.
흔히 ‘비자림’이라 불리는 평대리 비자나무숲은 수백 년 간 나무들이 스스로 숲을 형성한 보기 드문 사례다. 약 2,800여 그루의 비자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숲이 지닌 가치와 아름다운 경관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비자림은 평대리나 송당리 마을에서 멀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가장 먼저 숲길에 발을 딛는 이들은 마을 주민들이다. 상쾌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박자박 숲길을 걷다 보면 하루를 여는 마음이 가벼워진다.
생존 방식이 만들어낸 독특한 경관
주차장에서 숲길까지는 걷기 좋은 포장길이 약 5분 정도 이어진다. 철따라 철쭉과 수국, 배롱나무 등이 반갑게 여행자들을 맞는다. 벼락 맞은 비자나무도 있다. 반쯤 고사된 상태이지만 무성하게 잎을 피워낸 굳건한 모습에 입이 딱 벌어진다. 나무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언제 봐도 놀랍기만 하다.
숲길 입구에 다다르면 커다란 돌하르방이 말없이 환영 인사를 건넨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실은 속 깊은 친구 같다. 숲은 출도착이 같은 원형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느 쪽부터 탐방해도 상관없다. 보통은 ‘천년의 숲’ 이정표가 세워진 오솔길부터 시작한다. 탐방 시간은 넉넉히 잡아도 1시간~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바닥이 고르고 편편해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에 부담이 없다.
숲길에 발을 들이면 그간 숨 죽어 있던 오감이 되살아나는 난다. 가장 먼저 체감하는 건 청각이다. 숲 바닥에 붉은 화산송이가 깔려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화산이 폭발할 때 만들어진 화산송이는 섬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이처럼 숲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 발씩 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새들의 노랫소리와 어우러져 경쾌한 음악처럼 들린다. 바람이 한들거리며 이파리들을 떨어뜨리면 어디선가 나타난 숲의 정령이 말을 걸어올 것 같다.
숲에는 500~800년 가량 나이를 먹은 오래된 비자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긴 세월을 한 자리에서 자라야 하는 나무들은 모두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나뭇가지들이 겹치지 않게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자라다 보니 우리가 보기에는 괴상하고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일 테다. 독특한 경관이 실은 햇빛을 고루 받기 위한 나무들의 생존 방식인 셈이다. 자연은 스스로 돌보았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숲에는 나무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봄철에는 짝짓기에 나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노래처럼 귓가를 간질이며 운이 좋으면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노루도 만날 수 있다. 어디선가 ‘딱딱딱’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오색딱따구리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다.
새천년 나무와 연리목
고려 명종 때 식재되었다는 새천년 나무도 있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 2000년도에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숲에서 가장 오래되고 건강한 기운이 깃든 나무에 새천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새천년 나무는 비자림에서 최고령에 속하는 고목이지만 우람한 나무 기둥과 사방으로 뻗어 난 풍성한 가지들이 여전히 푸르른 기운을 발산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천년나무 앞에 서면 여전히 젊은 에너지가 넘쳐 흐른다.
반대편에는 연리목이 있다. 연인들을 위한 연가 같은 나무다. 가까이 있던 두 나무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줄기가 맞닿아 자라게 된 것을 연리목이라 하는데 애틋한 연인들의 마음을 닮았다고 해서 사랑나무라 불린다. 뿌리가 하나로 합쳐지는 경우는 연리근, 가지가 이어져 한 그루가 된 것은 연리지라고 한다. 비자림의 연리목은 나무 줄기가 하나로 단단하게 얽혀 있어 믿음직스럽게 보인다. 갖은 고난에도 묵묵히 서로를 지켜온 굳건한 언약처럼 느껴지는 나무다.
비자림은 한 번 걸음으로는 아쉬운 곳이다. 숲을 나서며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게 말이다.
비자나무숲 뒤편에는 풍만한 산체를 이룬 돝오름이 있다. 돝오름은 오름 형태가 돼지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돝오름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돗오름, 돛오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돝오름에선 너른 숲이 한눈에 잡힌다.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어 함께 다녀오기 좋다. 돝오름은 높이가 129m 정도이지만 비자림과 다랑쉬오름, 손지오름, 높은오름들이 펼치는 시원한 전경이 으뜸이다. 산 중턱까지 급경사 구간이 이어져 숨이 조금 차오르지만 조금만 힘을 내면 생각보다 더 근사한 풍경을 담을 수 있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비자숲길 55(비자나무 숲)
시간 : 09:00~18:00
입장료 : 일반 3,000원, 청소년 1,500원
문의 : 064-710-7912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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