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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초록 Sep 08. 2023

#독일. 취향이 잘 맞는 사람, 내 문화를 아는 사람

커피가 이끄는 스몰톡이 이렇게 무섭다


1.

처음 만난 그는 실없이 웃는 사람이었다.

커피 한 잔 하기 꽤 괜찮은 카페를 소개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어차피 10시 전까지는 계획이 없었던지라, 부담 없이 자리에 앉았다.


A는 내가 만난 유럽인 중에 가장 영어를 잘했는데, 영국에서 공부하다 온 티가 팍팍 났다. 미국인보다 영어 빨리 말하는 독일인 어떤데. 토플 리스닝 만점 별 거 없더라...


각자의 교환학생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했다. 지금은 얌전해 보이는 A의 과거 머리색은 꽤나 화려했고, 나 역시 형형색색 조명 사진의 비하인드를 풀어놓았다.



얘기하느라 커피를 30분이나 나오지 않은 것도 모를 뻔했다. 누가 봐도 우리 주문을 빼먹은 것이 분명한 종업원이 늦은 커피를 주며 한 말이 아직도 웃기다.

“There was a miscommunication.”


A: 당연히 '소통 오류'였겠지, 절대 까먹은 게 아니고.

Of course it’s a (with finger quotes) 'MIS-COMMUNICATION'. She never forgot it.

나: 나 4년 동안 커뮤니케이션 수업 뭐 하러 들었니? 이런 것도 소통 못하는데.

Useless four years of majoring Communication. Couldn’t even deal with this.


그 이후로도 A가 말이나 행동을 까먹을 때마다 '어? 혹시 미스커뮤니케이션?'라고 놀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카페는 작은 젤라또 가게, 핸드메이드 귀공품,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Graefestraße 골목에 있었다. 이 거리의 길목 테이블에서 베를리너들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여유로움은 상상 그 이상으로 평화롭다.


커피를 비운 뒤, 주변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도 동네 때문이었다. 조금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로컬 가이드를 해주겠다면 why not!



만남의 광장이라는 Admiralbrücke를 지나 공원을 따라 걷는 길. 꽃이 만개해 아름다운 부촌 거리도 걷고, 그가 좋아한다는 레스토랑이 위치한 골목을 지나기도 했다.



산책하다 본 괜찮은 바가 있었는데, 한 바퀴 도는 동안 만석이 되어버렸다. 아쉬워하는 내게 A가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이 동네는 아니고 걸어서 20분 정도 가야 나오는 로컬 바가 있는데 본인을 믿고 한 번 가보겠냐며. 아니면 인근의 평범한 맥주집을 가도 좋다고.


머릿속에서 '갈까? 말까?'로 꽃잎 따기 시뮬레이션이 빠르게 지나갔고, 마지막 꽃잎은 '가자'를 외치며 떨어졌다.




솔직히 가는 길에는 조금 후회했다. 정갈함에서 벗어나 점점 부산스러워지는 분위기에 잘못 선택했나 싶었다.


그런데 거의 다 왔다고 A가 말한 기점부터 골목의 분위기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 개성 있게 입은 사람들을 쫓아 왼쪽으로 들어가니 어스름한 핑크빛 저녁에 잘 어울리는 바, 각기 다른 음악들의 묘한 조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직업이 모델인 무리를 따라 들어간 바. 발 내딛자마자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무, 구릿빛 통풍로, 갈색 벽이 시크한 분위기를 내고 펑키한 비트 음악이 생동감을 덧대고 있었다.


A가 다시 보였다. 어떤 걸 해도 재밌어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건 정말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그것도 여러 번 들게 하다니! 적당히 깔끔하되 다채로움이 딱 알맞은 비율로 섞여 있는 취향.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반대편 대륙에서 만난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선물이었다.


베를린에 좀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최소 수백 개는 저장되어 있던 그의 구글맵을 훔쳐오던지.    





2.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은 공용어로 지정해도 되겠다.


독일인 B와는 애초에 한국 이야기를 하다 친해졌다. 내게 사진 2장을 보여주며 어디서 찍은 것인지 맞추면 커피를 사주겠다는 B. 정말 미안하지만 보자마자 맞췄다. 청계천이랑 천지연 폭포. (색깔 등이 둥둥 떠다니는 배경을 보고 청계천인 줄 모르는 한국인 찾기가 더 어려울 듯..)


그의 놀란 표정보다 더 놀라웠던 건 뒤에 그가 한 말이다. 커피를 살 시간이 없다는 것! 원래 베를린에 사는 친구가 아니었더라. (어쩌라는 거지 ??)


어쩔 수 없다는 내 말에 그는 이렇게 물었다.

“너 카카오톡 있어?”


이 친구, 놀라움의 연속이다. 빵 터지며 카카오톡 ID를 알려주었고, 곧 B와의 대화는 끝났다.




그렇게 베를린을 떠나기 직전, 알 수 없는 사용자에게서 선물이 도착했다.

…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수많은 외국인 친구들과 카톡으로 대화해 본 사람으로서, 외국인은 카카오톡으로 선물 보내기가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었다.


B: 거짓말은 안 할게, 이거 셋업하는데 평생 걸렸어.

Not gonna lie, it took FOREVER to set up.


하… 카톡으로 커피 쏴주는 대한독일인 어떤데…




선물하기 기능으로 시작한 대화는 이내 친근해졌다. B는이전에 한국에 교환학생을 왔었다고 한다. 베를린이랑 프라하에 마라탕 맛집을 추천해주질 않나, 소토닉 먹고 싶다고 하질 않나. 한국 패치가 많이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는 외국인과 대화하는 건 무척 편안했다. 한국과 독일의 직장 분위기도 쉽게 비교했고, 어떤 장소를 추천해 줄 때도 서울의 핫플을 엮어 설명해 주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유럽 마트는 컨디션을 안 파니 조절하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긴 여름방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B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에 본 적이 없는데도 내가 돌아가는 게 슬프다던 그. 나중에 아시아 여행을 온다면 마라탕 한 번 먹자는 농담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3.

여름이 끝나가는 지금 돌이켜보면 상상 같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모국어를 공유하지 않는데도 우연히 정서적으로 통하는 사람을 만났던 경험은, 간만에 산미가 강한 원두를 마셨을 때처럼 여운이 깊게 남는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과 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마음 덕택이라는 것. 독일에서의 시간을 꽉꽉 채워준 새로운 인연들은 별 거 없는 한 마디에 곁들인 미소로 시작됐다.


아, 그리고 커피. 역시 커피는 인생의 필요충분조건이다.






42일간의 유럽 여행을 기록합니다.

5개국 11개 도시의 여름을 다이어리에 담아왔어요.


독일, 프랑스, 체코,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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