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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킴 May 13. 2021

추억 일기 : 廣州 故事 17

칠성파 두목님

광조우 항공편은 늘 손님이 많은데 승객들의 구성원을 보자면 미국에 이민 가려는 광동성 주민들과 친척 방문을 위한 사람들, 동남아를 출발하여 광조우를 경유, 미국에 가려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이민과 장거리 여행을 감안하면 수하물도 엄청나서 공항은 시장처럼 혼잡하다.

평균 탑승률이 95% 이상인데 이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초과예약으로 탑승 조치가 불가한 상황이 생기기도 하는데 항공사 입장에서는 죄송스럽고 난감한 상황이며 손님 입장에서는 항공사의 매끄럽지 못한 일처리에 불만제기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하루는 100% 탑승수속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떤 중년 남자손님이 카운터에 급하게 오셔서 책임자를 찾길래 내가 나섰다.

탑승수속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반드시 귀국해야만 한다고 한다.


“내가 칠성파 부두목인데 사정이 급하니 도와주시오.”

“두목님. 이미 탑승수속이 마감되어 힘듭니다. 다시 예약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미안한데 그래도 한 번만 알아봐 주시오.”

“…”

결국 이미 탑승한 다른 손님의 선처로 잘 마무리가 되었고 두목님은 무탈하게 귀국할 수 있었다.


가라오케 콧수염

광조우에는 유명한 한국식 가라오케에 콧수염을 기른 인상파 매니저가 있었다.

광조우를 왕래하는 한국인들과 주재 근무자들이 늘어가자 자연스럽게 유흥주점도 같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콧수염을 길러서 자신의 취향이나 정체성을 알리는 도구로 활용했다는 측면에서는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시절 콧수염은 생소한 몽타주를 만들어 냈었다.

그러고 보니 동양권에서 유달리 수염을 기르지 않는 나라 중 중국과 한국이 유독 그러한데 아마도 유교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개발도상국 시절 권력자들의 강요로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사회규범과 반사회적 이미지라는 낙인을 찍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여간 당시 콧수염은 이 업소의 상징이었고 알콜 성분이 낮은 가짜 양주를 양산하여 유통시키던 시절 이야기로 이해하시라.


한국에서 손님이 오거나 지인들과 2차를 간답시고 콧수염을 찾아가곤 했는데 하루는 회사 손님들과 저녁식사로 1차를 한 후 가라오케로 2차를 갔는데 가짜 양주를 너무 마셨는지 유달리 나만 혼절하였고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가라오케 위층에 있던 모텔에서 홀로 잠이 깨였다.

다행히도 어제는 금요일이었고 오늘은 토요일이었으니 출근에 대한 부담은 없었지만 결혼예물 시계의 흔적이 없었고 머리는 띵하고 속은 거북하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털레털레 집에 와서 어제 과음의 상황을 핑계로 외박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사건은 수습이 되었지만 잃어버린 시계와 내 정신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으니 가짜 양주로 빚어진 나의 웃픈 이야기.


손중산 孫中山(1866.11.12-1925.3.12) #4

1911년 12월 25일 중산이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중국인들은 그를 떠들썩하게 환영했다.

12월 29일 14개 성에서 온 대의원들이 난징에서 그를 임시 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1일 중산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고 중화민국의 성립을 공포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중산은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 정부 형태를 받아들인 후 수도를 난징으로 옮긴다면 자신의 대총통 자리를 이양해 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중산의 혁명군은 위안스카이를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전쟁이나 내란은 외국 열강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나 권력보다는 중국 인민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중산의 제안이 있은 뒤 위안스카이는 황실에 압력을 가했고 2월 12일 황제 푸이가 퇴위했다.

여섯 살 난 푸이에게는 황제 칭호의 유지와 엄청난 양의 연금이 약속되었다.

황제의 직계 가족들도 특별한 대우를 약속받았다. 중국 최후의 왕조 청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위안스카이(좌) 푸이(우)

2월 13일 중산은 약속대로 대총통 자리에서 물러났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몇 달 뒤 중산은 전국철로전권이라는 직위를 맡았다. 그는 철도 운송이 중국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했고 전국을 돌며 일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는데 동의했고 1912년 중에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키로 했다. 그 해 여름 옛 동맹회의 일원이었던 쑹자오런이 국민당을 조직했고 1913년 2월 선거에서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공화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와 국민당의 싸움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끝이 났다. 3월 상하이의 기차역에서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중산은 다시 정치로 돌아와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할 세력을 모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예정된 수순을 밟아 나갔다. 1913년 11월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불법화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중산에게는 이러한 불법적 조치에 대항할 현실적 수단이 없었다. 그 해 9월 중산에게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중산은 다시 일본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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