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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레이첼 Nov 05. 2023

또 가을이 간다

변함 없는 사랑



저녁 햇살은 단풍잎을 지난 가을내내 비추더니 기어이 터트려  붉은 물감이 터져 나오게 하려나보다. 빛과 색이 붉은 오로라처럼 어우러지는 이 시간을 놓치지 않고 목격한 인간이 이 거리에 나 말고 또 있을까? 이 아리따운 시간에 다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안타까워 괜스레 창밖을 두리번 거린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매일 이렇게 찾아오는 햇살, 구름, 비, 특히 노을에게 마음을 빚진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다.




며칠 전에는 내가 사는 에서 부요한 여자를 봤다. 자신의 입술 색깔보다 더 빨간 단풍나무 아래서 고개를 치켜든 여자는 360도 빙빙 돌며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찍고 있었다. 요즘 웃은 적이 언제였던가? 갑작스레 웃음이 어린애처럼 나에게서 튀어나왔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노란 나뭇잎이 카펫처럼 깔린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무에 기댄 늙은 아내의 사진을 찍는 노인이 보였다. "와, 영화 장면 같다" 자세히 보면 영화 풍경이고 스치듯 보면 어디서 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 창문 앞의 단풍나무는 버티는 것인지 견디는 것인지 눈이 내릴 때까지 청청하다. 이 단풍 낙엽 위에 눈이 쌓인 지난해 겨울, 이들을 함께 치우느라 애를 썼다. 봄엔 주먹 쥔 아기 손같이 보드라웠고 여름엔 탱고를 추는 무희처럼 애절하던 내 단풍나무 이파리들이었다.


건너편 가로수 단풍나무들은 일찌감치 시에서 보낸 청소차에 떨어져 나간 지체들을 실어 보냈다. 도대체 내 창문 앞 단풍나무가 다른 이보다 늦게 피고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유를 모른다. 우리가 이유를 알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다 짐작이고 추측이건만 진실이라고 믿지 않던가? 그러길래 우리는 우리의 태도를 선택해 스스로 부요해질 수 있다. 나는 감사할 때 부요해짐을 내 삶을 통해 알아왔다. 감사함이 넘치는 가을은 상실의 계절이 아니라 위로의 계절이다.



얼마 전 숲길을 홀로 걷던 때의 일이다. 떨어진 나뭇가지가 부케 같아 집어 들었다. 저절로 결혼 행진곡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 무슨 뜬금없는 생각이람! 갑자기 하얀 신부 면사포를 쓴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30년 전 결혼식장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나는 펑펑 울고 있었다. 내 손을 잡아 줄 아빠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근처에 있던 하얀 열매가 달린 가지를 부케에 보태어 들고는 낙엽 카펫이 깔린 숲길을 한참 동안 걸어 다녔다. 그땐 몰랐지만 나는 나만의 치유 의식을 치른 것이다.



또 가을이 간다. 면사포 쓰고 혼자 울던 나에게 아버지처럼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더니 또 떠나간다. 저녁노을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이끌고 떠나가는 가을은 올해도 변함없이 내게 회복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오늘을 틀림없이 살게 해 준 가을이 아직 눈앞에 서성이고 있는데도 나는 벌써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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