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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Aug 31. 2020

#15. 살만한 생활


살만해졌다.

대리가 되고나서의 일이다.


별 다르게 달라진 건 없었다.

살맛나지는 못해도 다만 살만하다고 느낀 건, 진정한 그들의 식구가 된 것에 대한 묘한 안정감 덕분이었다. 주변의 눈치도 그랬다. 이제야 나를 존중해 주는 느낌이랄까. 다닐만해 졌다는 사실에 아침 출근길 멀미는 없어졌고, 일요일 저녁도 제법 살뜰히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원 시절 나는 여전히 학생에 가까웠다.

아직도 애기, 뭣 모르는 신입사원, 언제 퇴사를 고할지 모를 사회 초년생. 늘 나를 예의주시하며 간 보던 그만한 이유였겠다. 1년도 안되어, 혹은 1년 만에 퇴사를 고하던 A부터 Z가 알려준 교훈이었을 테니까. A부터 Z가 바로 친구들이었겠고, 그 틈 어딘가 x가 나였으니. 언제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그럴 거 같았어.’와 같은 존재였겠다.


어떻게 버텨내 대리를 달자 나는 어른에 가까워졌다. 정확히는 사회인이었겠다. 사원의 고달픔에 공감하기보다, 여기에 젖어 부장을 이해하게 된 걸 보니 말이다. 4년 사이의 일이었다. 학생에서 조금 벗어난 갓 신입사원이 차츰차츰 사회인 쪽으로 자리를 이동해 간 건. 어쩌면 움직임이었다기보다 미동 없이 물들어 버린 걸지도 모르겠고. 물들었다 알게 된 건 “저 언니는 맨날 검정 옷만 입고 다니네.” 하며 의아해하던 내가 무채색 옷으로 옷장 절반이나 채우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하루는 후배에게 조언하던 나로부터였다.


“그 정도는 참아야 하지 않을까?”


“그랬구나. 힘들지. 너 마음 충분히 이해해.” 한 마디 듣고 싶어 구하던 후배 조언에, 참으라 했다. 그 정도는 버틸만한 수준이라고. 지내다 보면 또 살만해지는 날 올 거라고, 나처럼. 그녀를 이해하기보다 회사 입장이 먼저 나와 버렸던 때. 알게 되었다. 나에게 과장 누구의 모습이 보였다.


살만하다는 것은 모나지 않게 여기에 눌러 살 형색을 갖추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마음이 편해지더니 거를 것 없이 말이 나왔다.


“부장님, 그건 좀 노잼 입니다. 푸하하하.”

“전 오늘 회식 안가겠습니다.”


재미없음을 노잼이라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가고 싶지 않은 회식자리는 빠지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 관여함 없이, “그래 알아서 해라.” 머리가 컸다.

여러모로 살만해 졌다.


업체에서도 대리를 무시하는 일이 적어졌다.


“이야. 대리 축하드립니다. 곧 과장 다셔야죠!”

“네. 그래야죠.”


머쓱한 미소와 함께 들었던 생각은 ‘그래. 당신이 괴롭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지만, 그러려니 한다.’ 위치가 자라니 그들에 대한 이해심마저 자라나 버렸다. 시간이란 그런 거고, 연륜이란 이런 건가 보다.


잘 버텼구나 싶다.

울컥하던 순간, 결국 화장실로 뛰쳐 가 변기에 앉아 눈물 흘리던 시절. 울렁이던 속 어디가 달랠 길 없던 날 잊혀지고 이번 달 찍히는 월급 통장을 보니. 앙증맞은 월급 일부를 떼어 어버이날 용돈이라도 드릴 수 있으니. 어쨌거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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