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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Sep 02. 2020

#16. 욕하던 그가 내가 되었다.


스민씨로 불리던 때, 적어도 나는 그러거나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


“후배 들어오면 일부터 백까지 따뜻하게 알려줘야지.”

“여자 후배라고 커피 타오라는 심부름은 맡기지 말아야지.”

“모르면 알려줄 뿐, 다그치지 말아야지.”

“때로 점심시간 따로 하소연도 들어줘야지.”

“6시 땡 치면 눈치 보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도록 ‘먼저 들어가’라고 따스히 선수 쳐야지.”


“대리되면 절대 그래야지.”


불끈 쥔 두 주먹에 바들바들 떨며 했던 다짐이다. 어딘가 친구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오빠 생각하면 꾹 참고 싶은데, 그게 안되는 게 우리 시댁이야. 나더러 골방 하나 내어 주며 우는 애 젖 먹이라고 하고 시어머니 시누이 둘 그리고 남편 모여 술 마시고 있더라. 나와 보란 말 한 마디를 안 해. 시누는 자기 애 둘 까지 나한테 맡기고 놀러 가지를 않나.”

“우리도 딸 둘에 남동생 하나라 나도 언젠간 시누가 되겠지만, 절대로.”


당해본 자만이 알 수 있던 서러움이 우리에겐 있었다. 덕분이었겠다. 그 얼마나 비열하고 치사한 모습인지 알게 되었으니. 반면교사라고도 하지. 가르침을 얻기 위한 대가가 너무도 컸다. 수년간 시달리던 멀미도, 스트레스 푼답시고 했던 1일 1밤식빵과 늘어난 지방도, 무력감으로 공쳐버린 시간도, 변기에 앉아 오줌 대신 흘리던 눈물도. 살을 깎아 배우게 된 그러거나 그러지 말기였다.


후배가 들어왔다.

같은 직위의 대리였지만 이곳 식구가 되어버린 나와 신삥 대리는 엄연히 달랐다. 유교사상이 녹아있는 직종에 선배들 하나같이 입 모아 “선배로 모셔라.”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선배다. 나이가 많던 후배였다. 기억하기로 대여섯 살쯤 많았는데, 그럼에도 선배인 나를 존중하는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를 존대했다. 사원 내내 다졌던 다짐이기도 했으니까.


“반가워요. 대리님! 잘 부탁드립니다. 모르는 거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용.^^”


팀 내 두 대리였지만 그와 나 사이엔 짬 갭이 존재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이곳 터줏대감이나 다름없었다. 봐도 몇 년은 더 봐온 회사식구들, 지난 해 경기도 어딘가에 집을 사게 되었다는 이웃 팀 상무님 소식, 재작년 결혼해 올해는 2세를 기대하고 있는 옆 팀 과장님, 여기 상무와 차장 사이는 톰과 제리와도 같아 어지간하면 중간에 끼지 않는 게 좋다는 흐름에 따른 경험. 반면 대리오빠는 아니었다. 나이만 먹었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여기 생활에 대해. 그런 그는 자연스레 나에게 의지했다.


“대리님, 업체에서 회신이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결제라인이 어떻게 되나요?”

“아. 과장님부터 해서 상무님한테까지 결제 받으시면 되요. 상무님 ‘왜?’라고 묻는 거 되게 좋아하시거든요. 조심하세요. 끊임없이 물으셔서 한 번씩 멘붕 올 때가 있어요. 욕 나올 때도 있으니 입단속 잘하시고요.ㅋㅋ”


대리님은 나를 따랐다. 아마 선배 중 가장 편한 사람이었겠다. 뭐만 하면 메신저로 물어오거나 자리에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새끼가 나에게 깃들어 있음을 보았다.


“대리님, 할 일이 생겨 그런데 이것 좀 해줄래?”

“후...네.”


이번에도 감춤이란 없는 나 때문에 들켜버렸다. 대답에는 한 숨이 있었고, 한 숨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예로부터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라고 했다.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른이 모르나? 요새 편하게 해줬구나 싶었다. 친밀감의 표시였을지 모르나 말끝에 빠져버린 “요”와 선배에게 일 미루는 꼴이. 신삥 이거 안 되겠네. 그날부터였다. 대리오빠를 후배, 아랫사람으로 대하기로 했다.


오빠는 착한 사람이었다. 충남 어디께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서울사람과는 어딘가 다른 순박함이 있었다. 순박함을 대변하듯 얼굴은 그을려 있었고, 이빨 한 구석에는 덧니가 자라 있었다. 양복을 입은 맵시만으로도 괜히 착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일 거다. 신삥 대리는 풍기는 냄새마저 그런 사람이었다.


잘해주고 싶었다.

받았던 설움은 나로부터 끝이라고, 되물림은 없을 거라 했다. 그랬다. 그런데 오늘의 쟈대리 그에게 보내는 말투가 곱지 않다. 죄다 물어오는 탓에 성가셔졌다. 그때 내가 그랬을 거다. 초보일수록 자꾸만 의존이라는 게 하고 싶어지는데, 초보 병이 나를 떠나 신삥에게 간듯했다. 지나가며 상무님 말했다. “좀 잘해줘.” 옆에 서 있던 대리오빠 왠지 측은해 보인 것 같았다. 맞는 말씀이에요. 잘해줘야 되는데.


막내 쟈스민을 지나쳐 버렸다. 징하게 싫어하던 사람이 내가 되어감을 알아차린 순간. 그게 나일지라도 그런 내가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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