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이라는 세계(3)

1. 튀르키예에 와 있는 기분(언어)

by 손은경

훈은 튀르키예어를 몹시 잘한다. 원어민 같기도 한데, 튀르키예 가족과 통화 할 때면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과 내가 살고 있던 것인가’ 생각한다. 그러다 두 가지 사실에 놀란다. 하나는 그가 튀르키예인이 맞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가 유창하다는 것이다. 그런 훈을 넋 놓고 바라보노니 그가 벙긋거리며 ‘왜요?’ 한다. 서울에서 현장감 넘치는 튀르키예어를 듣고 사는 사람은 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 대화는 어떻게 해?



국제부부라 하면 소통은 어떻게 하냐는 물음을 받는다. 통(通)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한가보다. 말이 통하고 몸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일은 사뭇 사랑하는 사이에 있어 그런 것이다. 그럼 영어로 해요, 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곧 대꾸가 돌아온다. 우와 은경씨 영어 잘하나 봐요. 멋쩍은 웃음으로 아주 잘 하진 못해요 하고 정직하게 말하지만 대부분 믿지 않는다. 둘 다 모국어가 영어는 아니기에 영어로 소통하기가 더 용이하다는 걸 모르는 눈치다. 우리는 진짜 영어(real english)에 취약하다.



한국어와 튀르키예어는 우랄 알타이 어족으로 문장 구조, 문법 체계가 유사하다.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하면 터키도 ‘Ben seni seviyorum(나는 너를 사랑해)' 하고,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요’ 하면 터키도 ‘Babam dunyanin en yakisiklisi(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요)’ 한다. 말이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 영어로도 대화 할 수 있다. 훈은 미드 <Better call saul>을 자막 없이 보고 깔깔거릴 만큼 영어 깨나 하지만 똥글리쉬도 무척 잘 한다. 저 아는 영어와 저 모르는 영어를 합쳐 튀르키예식으로 만들어 내게 말한다. 그럼 나는 또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 개떡이 찰떡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나야 늘 해왔던 것처럼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한국식으로 말하는데 우리가 “정말?” 하고 맞장구치면 옆에 있던 미국인만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고 한국 경력 2년 +a에 해당하는 훈이 한국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훈은 약 6세에 해당하는 한국어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취학 아동이 하는 말 같아서 6세로 붙여주었다. ‘결혼해 줄래?’라고 해야 했으나 ‘결혼해 볼래?’라고 해 ‘그래 볼까?’하고 대답한 적 있으며, ‘메추리알’을 (어떤 조합인지는 모르나)‘제푸리’라고 해 한참이나 ‘제푸리’ 근원을 찾아 헤매야했다. 고요 속의 외침처럼, 그는 메추리알을 말하나 제푸리로만 들렸기 때문에 오답을 스무 개쯤 말하고 알 수 있었다.



그런 훈이 한국어로 이야기하면 엄마아빠는 뭐가 웃긴지 깔깔 거리기에 바쁘다. 훈과 통화할 때 하는 대화는 이렇다.


- 그래, 훈아. 밥 먹었니?

- 네, 엄마. 잘 지냈어요? 네, 밥 먹었어요. 밥 먹었어요?

- 먹었지. 학교는 다닐 만해? 힘든 건 없고?

- 네, 좋아요. 조금만 피곤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 집에 언제 와요?


오호홍 하고 소리 내 웃다 “그래, 훈아. 잘 챙겨먹어. 따뜻하게 입고. 은경이 좀 바꿔봐” 한다. 그리곤 훈이가 한국말 많이 늘었다며 대학원에서 누가 외국인이라고 왕따 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아무렴 훈 어린이가 갸륵하고 가련한가보다.





그리고 나머지는 의성어 처리한다. 들리는 대로 소리 낼 수 있는 말. 순간적으로 영어도, 콩글리쉬도 기억나지 않을 때는 의성어만한 것이 없다. 가령 구운 방식으로 조리해 달라 부탁할 때는 허공에 손바닥을 앞으로 뒤로 내밀어 보이며 “즛스~즛스~” 하고 소리 낸다. 뒤집개로 프라이팬에 누인 식재료 누를 때 나는 기름 소리다. 그럼 알아듣고 굽는 방식을 택해 조리한다. 우리의 의성어는 한 번도 의도와 엇나간 적 없다.



인간이 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나 있다. 발신과 수신하게 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눈빛과 온기 진동이다.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긴데 어차피 대화는 오해를 바탕으로 한단다. 그것이 한국인과 한국인 사이 대화이건, 한국인과 튀르키예인사이 대화이건, 튀르키예인과 튀르키예인 사이 대화이건.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다른 것에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

밤 9시가 넘어 훈이 튀르키예에 있는 형과 통화를 한다. 거기는 이제 막 낮 3시, 얼핏 튀르키예에서 배웠던 욕이 난무하고 큰 웃음소리가 거실에 증폭된다. 빠르고 유창한 튀르키예어가 침대에 누워 있는 내 귓가로 전해진다. 여기가 서울일까 터키일까. 튀르키예어에 노출된 것만큼 튀르키예어가 늘지 않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을까. 문득 그런 것이 궁금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