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람이 울린다.
춘희는 5분을 더 기다린다.
아침과 함께 춘희가 스스로 군기를 잡는 버릇이다. 단 5분에도 온갖 의미를 더해서 자신을 위한 위안을 갖는다. 그렇지만 단 5분 뿐이다. 거울을 보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른 아침, 화장대 앞에서의 긴 시간은 사치다.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사실 정성스럽게 다루어진 얼굴이 더 볼품없다고 느끼는 까닭도 있다. 아마 매무새를 다듬으며 살아오지 못한 게으른 삶의 결과물로 치부될 부분이다. 옷까지 챙겨입고 현관으로 나서는 시간은 고작해야 15분을 넘기지 못한다.
북적일 줄 알았던 거리는 고요하다. 하얗게 서리는 입김을 위안삼아 춘희는 더 호흡을 크게 호호 들이내쉬며 어기적 걸음을 옮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미 저마치 정거장에서 버스보다 먼저 나설 채비를 마친다. 춘희는 걸음을 일정하게 유지한 채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때에 버스에 오르는 이들을 바라보며 이제껏 잊고 있던 경력 단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시간을 체크한다. 시계는 여전히 여유를 가리킨다. 걸음이 가볍다. 그들의 부지런함에 경탄을 표하지만, 춘희는 조금도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춘희는 결국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춘희의 부지런함은 스스로 성립한 조건을 거의 넘지 못한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아침 전경은 새롭다. 같은 사명을 같고 시작되는 아침의 움직임에는 사람을 설레게하는 무엇이 살아있다. 곁으로 교복을 차려입은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지저귄다. 매번 시끄럽다고만 피해다니던 무리들이다. 매일 걷던 길이 새롭다. 춘희는 일순 살아있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다. 남들과 같은 출근길을 밟는다는 것만으로도 춘희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춘희는 활기가 서린 움직임을 좇아본다. 어쩐지 걸음을 재촉하는 시간이 애석하다. 아니, 새롭다.
기다리던 버스가 마침 정거장에 선다. 춘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버스에 오른다. 춘희에게 이제 막 세상과의 입맞춤이 시작되고 있었다.
#2
춘희는 대체로 새로 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이란 대게 성실히, 배운대로 열심히 따라서면 '어찌 됐든 기본은 한다'는 근본 없는 믿음이 마음 깊은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낯설고 새로운 일을 만나는 것에 설렌다는 사실이 이제는 얼굴을 붉게 물들일정도로 부끄러운 나이에 들어선 것을 춘희는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빳빳하게 고개를 들어볼 참이다. 춘희에겐 이제 마땅한 카드가 없다.
오랜 고심 끝에 춘희가 꺼내든 카드는 공장, '공순이'이다.
꼭 한 번 아무 생각 없이 톱니바퀴처럼 틈을 맞춰 돌아가는 세상 속으로부터 도피하고 싶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예전엔 높은 시급 덕에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직군으로 급부상한 터라 마음만 먹는다고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다. 그래도 결국 공순이지 않은가.
종이 위로 가벼이 새겨진 한 줄의 이력과 함께 코웃음을 치며 느지막이 고개를 내밀고도 부끄럼없이 공석을 원한 적도 있다. 따가운 눈총에 속내라도 들킨 듯 부끄러워 자리를 내어 받고도 발길을 돌린 기억도 있다. TV에서나 세어 나오던 군기가 바짝 든 공순이의 모습은 실오라기도 떠올리지 못한 채 막연한 기대감으로 춘희는 처음으로 공장이라는 곳에 와있다.
춘희는 심호흡을 하고 입구로 천천히 들어선다. 건물 내벽을 두드리는 기계의 시끄러운 소음이 춘희에게 인사를 건넨다. 낯선 환경이 전하는 알싸한 긴장감이 몸 전체로 스민다. 한 코너를 돌면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만큼은 진지한 자세로 임해보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고 가다듬는다. 전투의 시작이다. 춘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와요."
이미 여러 번 경험한 기이한 눈빛의 환대가 춘희를 향한다. 내부에는 춘희보다 나이가 열살은 많아 보이는 직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서 있다. 능숙하게 내부 공간을 진두지휘하는 그들은 한 눈에 봐도 경력이 많은 숙련공으로 여겨졌다. 춘희는 힐끗 눈치를 살피고는 인사에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한다. 발걸음이 닿은 순번대로 직원들은 유니폼을 받는다. 어떤 인사를 해야할지 걱정하는 사이에 똑같은 옷이 손에 쥐어졌다.
잇따라 두 어명의 직원들이 들어선다. 이번에는 춘희보다 열 살은 어려보인다. '젊은이들도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구나'하며 숙련공들을 따라 춘희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젊은이들은 꺄르르 웃음으로 화답하고는 춘희를 위 아래로 훑는다. 그네들은 춘희가 쓴 모자가 비뚫어졌는지 능숙하게 바로 잡아주며 손보다 곱절은 큰 장갑 사이즈를 짝에 맞게끔 건넨다. 유니폼을 걸치는 것만으로도 TV 속 한 장면에 놓인 것처럼 춘희는 기이한 환상에 사로 잡힌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새롭다.
"일하러 들어갑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는 춘희다.
#3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공장의 하루가 시작된다. 같은 날 시작했다는 말이 낯설게 춘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각자의 자리를 찾는 모양새가 매끄럽다. 춘희는 제 몸짓만한 한 움쿰의 인형을 부여받고는 한참이나 제 몫을 하지 않은 듯 찌든 기름때가 먼저 눈에 띄는, 낡은 미싱기 앞으로 앉는다. 처음은 으레 그렇다. 고작 몇 마디의 말을 섞었을 뿐임에도 춘희는 으레 자신의 자리를 찾아 허리를 숙인다. 언젠가부터의 버릇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며 춘희는 저도 모르게 어른의 태도를 더듬곤 했는데, 띄엄 띄엄 새겨진 경력때문이라고 탓하는 건 춘희의 입버릇이다. 나이를 세는 일이란 영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춘희는 본능이란 단어는 반드시 나이에 비례하는 것이라고 새삼 감탄했다.
미싱기 앞으로 앉은 춘희는 거창한 작업이라도 대기하고 있을 줄 알고 숨을 죽였지만, 고작해야 정해진 위치에 콩알만한 눈알을 콕 붙이는 아주 간단한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딱히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기계에 약간의 힘을 가하여 위아래로 반복해서 기계를 움직여주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춘희는 짐짓 진지한 자세로 인형을 관찰한다. 초보자가 성실하게 보일 수 있는 최대라고는 완성된 인형의 눈알이 재봉된 정확한 위치를 기억해 비뚫어짐 없이 단단하게 제 위치에 고정시키는 것 뿐이다.
춘희는 왜인지 무척 경건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무언의 암시라도 있듯 세상 본 적 없는 경건한 자세로 그 쉽고 편한 일에 임했다. 기계 가운데로 이 단순한 일에 열성을 다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 잠시 떠올려 본다. 기계 소리만이 비웃듯 춘희에게 응답한다. 고개를 들어 직원들을 눈으로 훔치는 춘희였다. 아무 생각 없이 시름을 덜어놓고 일에만 집중한다는 것이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오만한 이야기였던가.
'공순이들은 보통 어떻게 일하지’
무의식에 제 것인양 튀어나온 생각이 밖으로 세어 나갈까 낮은 자세로 몸을 움츠리는 춘희였다. 눈알이 생긴 인형들이 차곡이 옆으로 쌓여간다. 삐걱이는 자신의 모습만이 내내 거슬리는 춘희다. 인형이 수북이 쌓여갈수록 춘희는 더 긴장해야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들의 태도가 그랬다. 그 어느 곳에서도 본 적 없는 전문가의 태도는 단순히 기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춘희는 더욱 속력을 높여 본다.
어느새 시계는 오후를 넘어서고 있다.
손은 기계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날렵하게 움직인다. 몇 번의 같은 일을 반복하고 나면 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일정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이 신기해 춘희는 한참이나 응시해 본다. 말이 오가지 않는 공장의 정경은 오차가 없다.
인형은 보통 재봉과 수선, 그리고 포장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대다수의 작업은 사람이 아닌 기계의 손을 거친다. 그러자면 사람의 소리보다, 기계의 소리가 공간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춘희의 건너편으로는 춘희에게 전달될 이제 막 재봉을 끝낸 인형이 대기 중이다. 재단된 인형은 다시금 춘희의 손을 거쳐 눈알이 생긴 뒤 완성된 인형의 모습을 갖춘다. 완성된 인형은 포장대에 올려져 일정한 양식을 갖추고는 가격이 매겨진 태그가 달리게 된다. 그 과정은 엄숙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엄격하고, 진중하다. 기계가 이루는 장엄한 소음이 더욱 그러하게 비추었다.
춘희는 돌연 이 엄숙한 작업이 공장에서 진행된다는 이유만으로 '공순이'라는 직명이 붙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필시 한 걸음만 나서면 코웃음을 치며 의미를 두었다고 후회를 할 춘희였다. 그럼에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여겨졌다. 심혈을 기울여 눈알을 붙이고 나면 곧 매대 위에 놓일 인형 하나를 저 혼자 완성이라도 한 듯 장인 정신마저 새겨지는 듯 했다. 그들이 그랬다. 그래 보였다. 숙련된 이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작업에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이루고 있었다. 춘희는 눈알을 연이어 붙이며, 스스로 그러하면서도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소음을 따라 단조로움은 지속되었다.
#4.
'지이이잉 – 칙’
일정한 소음을 내는 기계음에는 규칙이 발생했는데, 춘희는 그 규칙 사이를 파고들어 저도 따라 '쿵'하고 한 음을 더하며 리듬을 만들었다.
'지이이잉 – 쿵', '지이이잉 – 쿵'
작은 리듬에도 활력이 생긴다. 소음을 따라 기계를 놀리는 춘희의 모습은 더이상 단조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춘희는 이럴 때면 남들 입에서 구설처럼 떠도는 '천재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고작 이러한 움직임으로 그런 거창한 단어를 들먹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속도의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서로에게 당장의 위안뿐이라는 것을 춘희는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춘희는 이내 들고 있던 인형의 눈알을 보드라운 얼굴 위로 콩 얹어 놓고는 새긴 리듬을 따라 더욱 세게 누른다. 인형은 점차 기성의 무엇처럼 온전한 모습을 띄는 듯 했다. 춘희가 능숙한 숙련공의 모습을 띌수록 소음은 규칙적인 리듬을 일구지 못했다. 춘희는 이내 소음이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지이이잉 – 칙’
한참을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춘희에게 기계의 소음을 비집고 정체불명의 소리가 전해진다.
SE> 미안합니다.
춘희는 잠시 서두르던 손을 멈추고, 프로의 얼굴을 멀끔히 바라본다. 일에 몰두한 그녀의 얼굴로는 구겨진 미간이 전하는 약간의 짜증 외엔 전해지지 않는다. 춘희는 부러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소리의 정체를 찾는다. 모두가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일에 몰두해 있다. 춘희는 소음이 신경쓰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금 일에 몰두해 본다. 솔직히 전하자면 춘희에겐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제 일에만 몰두하는 공장은 단조롭다.
숙련공들은 그러한 단조로움을 즐기듯, 일이 익어갈수록 더욱 기계음을 높였다. 목청을 높이는 기계음 속에는 많은 것들이 감추어 있다. 사람의 소리가 멈춘 공간은 그렇게 숨을 죽이며 단조로운 화면을 담아내고 있었다.
인형은 어느새 수북이 쌓여 벽면으로 높은 산을 그리고 있다.
어느 정도 양이 차오르면 인형은 포장을 위해 짝을 이뤄 컨테이너 벨트로 향한다. 일꾼들은 일렬로 주욱 늘어서 이제 막 완성된 인형을 환영할 채비를 마친다. 기계가 돌기 시작하면 행렬을 이루는 인형을 따라 포장재를 입히고, 숙련된 솜씨로 가격표를 붙인다. 레일을 따라 떨어지는 인형은 수를 세어 박스에 옮겨지게 된다. 이렇게 포장이 완성된 인형은 세 박스씩 짝을 지어 공장 벽면에 세워지게 되고, 출고 날짜가 새겨진 스티커가 붙혀지면 밖으로 나설 모든 준비를 끝낸 셈이다.
아무리 인형이라지만 두 다스씩 엮어진 박스의 무게를 허리로 지탱해 높은 탑을 세우는 일은 곤욕이다. 경력 단절 딱지에도 나이가 지긋한 프로들을 모시며 하는 일에 대해 새삼 실감하는 춘희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로들의 움직임에 틈이라곤 없다. 허리가 휘는 것이라곤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매번 휘청거리는 몸둥아리를 그리도 바삐 움직인다. 옆으로는 관리직이라는 한 남성이 수를 확인하며 숙련된 움직임을 감시한다. 세워진 박스만큼 자리를 차지하는 큼지막한 기계차는 대량으로 옮길 때만 쓰는 것이라고 했다. 춘희는 삐딱한 영웅 심리를 앞세워 나이를 잊은 프로들보다 좀 더 빠르게 움직여 본다. 머릿속은 온통 '이런 내가 옳은가, 바보 같진 않은가'하는 의미 없는 물음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SE> 미안합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춘희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해본다. 선명하게 세어 나오는 목소리는 분명 주인은 없었지만 필시 노동자의 것으로 여겨졌다. 목소리는 딱딱하고, 갈라진 기계음에 가까웠다. 도무지 철두철미한 프로들에게선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초첨이 사라진 채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그녀들은 도무지 소리라곤 들리지 않는 모양새다.
춘희는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춘희를 내내 괴롭히던 의무감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어서는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프로를 눈으로 찾는다. 춘희는 그러한 움직임을 안다. 춘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프로는 이미 자리를 옮긴 뒤였다.
#5.
"사과해!"
춘희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이들을 향해 홀로 분개하며 목청을 높인 언젠가의 시절을 떠올린다. 세상을 향한 질타가 냉대와 비난이 되어 돌아오던 시간들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야 했던 설움에 대해 꾹 삼키며 견뎌내던 시절들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짐을 덜 듯 자신의 감정에 심취해 폭력을 전가하는 이들이 춘희는 그렇게 밉지 않았던가.
시대는 세기에 걸쳐 한 번 올까 말까한 원인 없는 역병을 맞이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혁명을 노래했다. 혁명의 몸부림은 무력 앞에 예정된 수순처럼 인내심을 잃었고, 폭등은 거세졌다. 젊음의 저항은 아주 쉽게 제자리로 돌아섰다. '익숙한'것 앞에서 인정을 잃은 모양새란 21세기에도 영 거북한 일이었다. 변하지 않으려는 탄성 앞에 혁명은 낡은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SE> 고맙습니다.
춘희는 이내 사라지고만 주인 없는 몇 마디를 잊지 않으려 몇 번이나 떠올렸다.
인형이 제 모습을 갖추어 갈수록 소리가 전하는 사과는 분주해졌다. 춘희는 소리가 반복될수록 알 수 없는 자괴감에 젖었다. 숙련공들의 초점 없는 시선이 춘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사과해!‘
춘희는 목청을 높이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생눈으로 확인하는 처참한 몰골 앞에 제 억울함을 상기하는 이는 없었다. 춘희는 숙련공들을 따라 손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몇 차례 횟수를 반복하고는 점차 인간의 그 무언가를 닮아갔다. 그 가볍고, 차가운 것 말이다.
춘희는 불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단조로운 기계 소음만이 여전히 공간을 지배한다. 모두가 묵묵히 제 일을 할 뿐이다. 이곳에선 흠도 흠이 아니다.
#6.
날이 밝으면 공장은 소음을 내뿜는 기계를 따라 기지개를 켜며 어김없이 돌아간다. 한 타임이 끝나면 춘희는 조장의 명령에 따라 휴게실로 이동한다. 고작 한 코너를 돌았을 뿐인데,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핀다. 한 손에는 휴대폰이, 다른 손으로는 쥐어온 새참을 들고는 겉으로 빙빙도는 농이 오고 간다. 춘희는 신참답게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쏟아지는 농 속에 하나를 보텐다. 고작 7명이 머무를 뿐인데도 목소리는 제 언어를 잃어버린다. 그럴 때면 춘희는 시끄럽게 머리를 때리는 기계음이 떠올랐다. 춘희는 자세를 가다듬는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가동되면 공장은 다시금 분주해진다. 춘희는 요전 날 어렴풋이 들린 목소리를 떠올린다. 흡사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연상케하는 요란한 기계 소리에는 그 날 느꼈던 그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춘희는 바지런한 그들의 몸짓을 멍하니 바라본다.
"무슨 생각해?“
춘희는 정신을 번뜩 차리고는 다시금 손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한다.
둘째 날은 첫째 날보다 수월하다. 정성을 들여 정확한 위치에 주어진 눈알을 놓지 않아도 어느 정도 손에 익은 감으로 속력이 난다. 애초에 지원했던 목적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군기가 바짝 든 몸은 다만 기계음 때문만은 아니다. 무섭게 울려대는 기계보다 말없이 속력을 높이는 숙련공들의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긴장감이 절로 몸에 스며든다. 기계음보다 큰 호령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졌다.
공장은 대다수 여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마도 꼼꼼하고 싹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수를 세고, 셈을 더하는 일은 이상할 정도로 젊은 남성이 도맡았다. 본사 직원이라고 했다. 춘희는 무겁고 험한 기계를 다루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부모'라는 짧은 단어가 떠올랐다. 그 외에는 상황을 납득할 마땅한 사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사 자격증을 따면 더 높은 급여를 받고, 수를 셈하는 쉬운 일을 할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품었던 10여 년 전의 지난 날이 떠올랐다.
프로는 매번 제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일꾼이었다. 그런 성격을 공장장도 아는지 유독 프로에게는 손을 더하지 않는다. 그럴때면 미련하게 그 많은 박스를 저 혼자 옮기는 프로의 모습이 제 모습처럼 춘희는 보기 싫어졌다. 저 멀리 제 모습과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프로의 딸이다. 관리자라는 젊은 남성이 그녀의 뒤로 몇 회나 어기적댄다.
프로는 묵묵히 박스를 옮겼다. 손이라도 거들까 옆으로 다가서면 처음으로 성을 내는 그녀의 모습을 마주한다. 울그락 붉그락 변해버린 얼굴로 그늘진 그녀의 설움을 떠올려 본다. 그녀는 기어코 그 무거운 것들을 끝끝내 혼자 옮겨 댔다. 춘희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7
어둠이 내려앉은 퇴근길은 포근하다. 춘희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다. 공석이 없는 버스의 사이 틈으로 저마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일용할 양식을 품고는 제 가족을 떠올리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 포근해진다.
"씨발"
평화를 깨는 총성이다. 성큼성큼 부끄러움도 잊은 듯 다가서는 이들은 늘 알던 사이처럼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춘희는 기이할 정도로 이런 일에 침착하다. 요령있게 타인과 거리를 두는 법이 몸에 벤 듯 무례함을 대할 때 단호해지는 것은 춘희의 오래된 직업병인지도 모르겠다. 그럴라치면 한참이나 서성이던 이들도 잠잠해진다.
춘희는 손으로 휴대폰의 끝자락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린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쉰다. 서성이던 낯으로 드리워진 야욕에 대해 춘희는 어렴풋이 가늠해본다.
춘희는 역시 소음이 싫다.
#8.
식사 시간이 시작되면 모두가 프로의 호각과 함께 일렬로 식당으로 향한다. 산더미 같이 쌓인 물량이 실력의 비등함을 낱낱이 고해도 이 순간만은 모두에게 평등함을 선사한다. 예외가 없다는 사실이 괴로움으로 다가선다는 것을 춘희는 이제야 깨닫는다.
식당은 공장 주변의 인부들과 직원들로 채워져 있다. 밥을 먹는 시간만큼은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다. 프로는 새로 온 숙련공들을 맡는다. 춘희는 프로의 오른팔과도 같은 맏이와 식사를 한다. 맏이는 식사를 하기 전에 꼭 사진을 찍어 둔다. 나면서부터 습관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면 맏이는 주저 없이 일어선다.
맏이는 늘 바쁘다. 쉬는 시간에도 온전하게 10분을 제 자리에 앉아있는 적이 없다. 일터로 돌아서도 마찬가지다. 맏이는 낡았어도 동그랗게 회전이 되는 의자에 여간해선 앉지 않는다. 역시 습관이라고 했다. 맏이는 본사 직원들이 으뜸으로 여기는 직원 중에 한 명이다.
"참 저 어제 집에 가는 길에 이상한 사람들 봤어요.“
"이상한 사람?“
"네,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딱 한 눈에 봐도 눈빛이 쎄- 한 사람들"
"어머, 알지. 왜?“
용기를 내어 춘희가 입을 연다.
쉬는 시간이 가장 어려운 춘희였다.
"네. 버스에서 눈이 마주쳤는데 미친놈처럼 다가오는 거에요. 깜짝 놀라서 얼굴을 봤더니,
그 젊은 남자분 닮았더라고요. 지난 번에 막 내려와서 서성이던“
"누구 말하는 거야? 관리자?“
"어머, 관리자?“
침묵은 깨졌다.
숙련공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춘희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지 잠시 망설인다.
"놀랐겠다!“
"시간 거의 다 되어가지?"
"게임 좀 그만 하랬지?“
"어? 이게 잠깐만.. 다음 판으로 안 넘어가네“
휴대폰을 들고 이야기를 듣던 숙련공들의 시선이 흘끗, 춘희에게 닿는다.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건너는 위안을 못 이겨 우리는 부던히도 한 마디씩 설긴 말을 보태는가 보다.
"난 휴대폰 베터리 방전 됐나봐. 충전기가 어디갔지?“
"또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휴게실로 웃음이 가득 채워진다. 저만치로 춘희가 그들을 바라본다. 춘희는 치부를 훑어낸 듯한 막연한 죄책감에 사로 잡힌다. 날이 저물면 모두의 얼굴로 작은 그늘이 내려 앉는다. 반나절 요란을 떠는 기계음도 숨을 죽이는 시간이다. 춘희는 여간해서 긴장을 하지 않는데, 숙련공들의 노련함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만 졌다.
기계가 멈추고, 공장의 불이 꺼진다.
춘희는 홀로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긴다.
#8-1
"집으로 가는 거야?“
춘희에게 버스타러 가는 길을 알려준 숙련공이다. 그녀는 같은 날 함께 시작한 초보자라고 하였지만, 춘희는 그녀를 숙련자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몸짓이나 태도가 일이 시작되면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여간해선 잘 웃지 않았는데, 춘희가 몇 번이나 태도를 꼬집어 숙련자가 아니냐며 그녀를 다그칠 때면 한사코 거부하는 그녀에게 두 번의 농을 칠 여력은 마련되지 않았다.
"네. 오늘은 걸어 가려고요“
"그래? 그럼 이쪽으로 가자. 지난 번에 갔던 길 괜찮지?“
춘희는 순순히 응한다.
"아까 낮에 했던 말 말이야“
춘희가 대답한다.
"네.“
"어떤 말이야? 그 버스에서...“
춘희는 회사의 일에 깊이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린다.
"보긴 봤는데,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요. 저도 워낙 신기하고 놀라서“
“그러니까.. 요즘 세상에..”
춘희는 평소와 달리 이야기를 이어갈지 고민한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두고 춘희가 농을 던지려 숙련자를 바라본다.
"건물 옥상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 "
"네?“
"아니, 막 아파트 옥상에서 담배피는 사람들 있잖아. 건녀편 바라보면서..“
"네? 언니, 무슨 말이에요?“
놀란 춘희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숙련자를 바라본다.
"아파트 옥상에서 담배피는 사람들이요?
"응, 아파트 옥상에서 건너편을 빤히 바라보는 거야..“
횡설 수설 무슨 말을 건네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춘희가 다시 한 번 되묻는다.
"옥상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
"가슴이 막.. 요즘엔 기자들이 막 그런거 막 쓰고 그런다는데“
"기사요?“
"아니.. 아니야“
말을 이어가는 숙련자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그녀가 말을 그만두고 싶은 건지 이어가고 싶은 건지 춘희는 헤아릴 수 없다. 가끔 기사쓰는 일을 하는 춘희는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는 이야기에 당황한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춘희의 뇌리를 스치지만, 춘희는 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이야기는 끝이 났다. 꼿꼿한 자세로 걸음을 서두르는 숙련자를 춘희가 따라선다.
#9.
어느덧 약속했던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다.
삐걱- 삐걱- 삶이 굴러가는 소리처럼 항상 제 자리에서 소리를 내는 기계를 정이라도 떼듯 춘희는 한참이나 바라본다. 사람들은 기계를 두고 툭툭 치기도하며 농을 던졌지만, 춘희는 오래된 기계에서 여물은 숙련공의 모습을 떠올린다.
공장은 사람이 빠져 나가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평범한 아침을 맞는다. 춘희도 아무렇지 않게 숙련공들과 아침의 인사를 나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춘희는 여전히 인형에 눈알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춘희의 실력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손은 제법 공순이의 것을 닮아간다.
춘희의 뒤로는 첫날 프로의 딸을 괴롭히던 관리자라 불리우던 젊은이들이 서성인다. 춘희는 관리자를 노려보다, 지난날 숙련자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할 말이 남은 그녀의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인지도 모르겠다. 관리자가 몇 번이나 하릴없이 춘희의 뒤로 반복해서 서성이자 숙련공들이 마침내 입을 연다.
"관리자님 오늘 멋지시네."
이제야 낯이 겨우 익은 맏이가 공장 안팎으로 연실 드나든다. 화가 난 것도 아닌데 부러 인형을 세게 박스 안으로 밀어 넣는다. 옆으로는 무너져 내린 몸으로 연신 무거운 박스를 옮기는 프로가 스친다. 춘희는 멀끔이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들고 있던 인형을 맏이보다 더욱 세게 퍽- 소리가 나도록 휙 내던진다. 몇 번이고 분이 풀릴 때까지 훅훅 내던진다.
숙련공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음꽃을 피운다. 관리자들은 그제야 만족한 듯 가벼운 파일 위로 몇 가지를 끄적이더니, 시계를 흘끗 보고는 자리를 피한다. 숙련공들이 그들을 향해 환하게 인사를 건넨다. 춘희는 부러 소리가 들리게 인형을 더욱 세게 박스에 던져 넣는다. 왜인지 지 몫도 아닌 화를 삭히던 어제가 떠오른다. 한 주 사이에 새 옷을 입듯 벗겨지고, 기름칠이 더해져 말끔해진 기계는 더이상 소리를 내며 울지 않는다.
춘희는 애꿎은 기계를 하염없이 노려보다 울컥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킨다. 서둘러 인형에 눈알을 붙혀 본다. 춘희는 자신의 눈물이 어디로부터 파생되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