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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 Aug 16. 2024

예민함도 강점이다.

01. 딸과의 대화

저녁을 먹고 여느 때와 같이 대충 치우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예전 같으면 깨끗이 치우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해야 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체력이 많이 달리니 먹는 것도 힘이 들어 꼭 쉬어야 다음 뭔가를 할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주부들은 먹는 것만 하는 건 아니다. 씻고 다듬고 만들고 차리고 먹을 때 즈음이면 이미 방전인 샘이다. 입시를 곧 앞둔 고3 딸이 또 말을 걸어온다. 속마음은 빨리 좀 들어가 인강 하나라도 더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모른 척 우쿨렐레 악보를 보고 있는데 툭 건넨다.


“엄마도 그림 그려보는 게 어때?”


아이의 말에 짜증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온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건데……. 넌 너 일을 하면 되는데 왜 바쁜 네가 나까지 신경을 쓰는 건지……. 그런데 말투가 시비조가 아니다. 그럼 대꾸를 좀 해줘 볼까 싶어 이유를 물었다. 사실 마음은 빨리 대화를 끝내고 방으로 들여보내고 싶었다. 예민함에 갱년기까지 겹쳐 가족 누구와도 말 섞는 것도 귀찮다. 단정 짓듯 건넨 말에 아이는 이유는 묻지 않고 이유를 들어야겠다는 눈으로 말갛게 쳐다본다.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많이 예민하잖아 물론 하고 싶어. 그림 그리고 싶지 언젠 간 할 거야.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우선 얼마 전 다시 시작한 우쿨렐레 합주를 잘하고 싶고, 또 다른 나만의 계획 시간표가 있는데 그림까지 시작하면 엄마 성격에 잘하고 싶은 마음에 스트레스 엄청 받을 것이고, 어쩌면 하다가 다른 것들까지 그만 둘지도 몰라. 이제 그러기 싫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 딸은 예고에서 미술 그것도 동양화를 전공하고 대입을 준비하고 있는 미술학도이다. 딸이 나에게 건네는 말은 이랬다. 자신이 그림을 배우고 그리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치유가 많이 되더라. 그림을 그리려면 가만히 조용히 생각을 하게 되고, 어쩌면 엄마 자신의 불안함, 예민함을 치유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게 그림을 권한 이유였다.  

딸아이가 그림을 넌지시 권한 건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1이유를 듣고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잠깐 머리가 멍했다. 딸이 나를 많이 생각하는구나. 그런 딸도 예민한 나로 인해 힘들었겠구나. 외면하고 싶었지만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실이다. 나는 장난조로 이제 이게 나를 병자로 만드네……. 우리 둘이 크게 한번 웃고 대화는 끝이 났지만 이 대화의 끝으로 나에 대한 내 생각은 시작이 되었다.  


나는 내일모레 반백살 50을 바라보는 정말 평범 1등 주부이다.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고, 또 멋진 커리어도 없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얼마 전 코로나를 겪으면서 백신 부작용인지, 코로나 부작용인지 모르지만 신부전증이라는 병도 얻었다. 태생도 예민한데 어릴 적부터 골1골이 었기도 했고 자라온 환경도 그다지 여유롭진 않았다. 조금 일찍 갱년기가 찾아와서 살짝 정신 줄을 놓으면 우울증이 지금 당장 와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초초 예민 아줌마다. 어떨 때는 온몸이 너무 아파 손가락 까딱 할 힘도 없는데 누워서 저만 치 보이는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머리카락 하나가 그냥 넘어가 지지가 않아 일어나 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한마디로 깔끔 떠는 유별난 성격이다. 문제는 이 잣대가 나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가족들에게도 적용한다는 것. 이렇다 보니 가족들은 불만 가득이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100% 내 뜻대로 움직여 주는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가족들은 덜렁덜렁하고 털털하고 대충이라 정작 나는 너무 힘이 드는데 분명 내가 힘든 만큼 가족들 또한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아무리 가르쳐도 방청소나 정리가 잘 되지 않았고, 책은 순서대로 꽂히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쓰다 보니 또 답답함이 밀려온다. 어느덧 커버린 고3딸과 중3아들 그리고 남편, 그들은 바뀔 생각도 없다. 나이가 드니 좋은 건 힘이 빠지고 탄력성이 생기는 듯하다. 이쯤 되면 내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하고 나도 슬슬 지쳐갈 때 즈음 나의 예민함을 강점으로 바라보고 나를 조금은 더 사랑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의료시설의 발전과 다양한 먹거리, 삶의 질이 상승되고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화시대에 이제 사람의 수명은 100세가 아닌 110세 를 맞이하는 시대라고 한다. 딱히 몇 살까지 살고 싶다는 소망은 없지만 추잡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에겐 상관없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엄마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서 하고 싶은 게 글쓰기였다. 글을 쓴다 생각했을 때 그 처음은 당연 가장 잘 아는 나에 대해서 써야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로 내세울만한 강점은 없고 약점 투성이. 망했다. 그럼 약점을 강점으로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막연히 생각이 들었다. 우선 글 쓰는 법부터 배워보자 싶어 글쓰기 강좌나 동호회가 없는지 도서관 프로그램도 살펴보고 문화센터강좌도 알아봤다. 마땅한 성인 대상의 강좌는 없었다.  

그러다 지역카페에서 알게 된 글쓰기모임을 발견하고 쪽지를 보냈더니 완전 웰컴 분위기이다. 난생처음 글쓰기 수업을 아무 생각 없이 호기롭게 참석했는데 한없이 작아졌다. 내가 놓친 게 있었다. 이곳은 글쓰기 강의가 아닌 글쓰기 모임이었다. 나처럼 날것의 생초보가 오는 곳이 아닌 이미 글을 쓰거나 문창과를 전공하신 분들도 계신 약간의 아마 프로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주제를 주고 10분 동안 글을 쓰고 서로 같은 주제로 쓴 글을 발표하는 방식이었는데 정말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다음 수업을 가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근 20년 주부 생활에 늘어난 뻔뻔함으로 삼세번은 나가 보자 결정을 짓고 정확히 두 번 더 나가고 그곳은 갈 수 없게 되었다. 갈수록 더욱 작아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글은 더더욱 쓸 수 없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글을 써 보겠다는 다짐은 또 묻힌 채 5개월이 지났다. 아이들 한참 어릴 땐 각종의 지역정보를 누구보다 발 빠르게 득하여 움직이기 위해 하루에 수십 번씩 들여다보던 지역카페를 이제는 아이들도 커버리고 거의 보지 않게 되었는데 한 번씩 눈에 띄는 카페 글이 자꾸 신경 쓰인다. 한강맘 대상으로 글쓰기 강좌를 50%에 해준다는 옆 동네 책방의 홍보 글이다. 무시하고 넘기기를 수없이 했는데 이 책방 주인이자 선생님도 홍보글쓰기에 열심이다. 계속 보인다. 마치 빨리 오세요. 바로 지금이에요. 글쓰기 시작하기 딱 좋은 때랍니다.라고 꼬시기 라도 하듯 계속 글이 올라온다. 마치 홀린 듯 또 쳇(chat)으로 문의를 했다. 그렇게 나를 위한 본격적인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나는 사실 배우는 걸 참 좋아한다. 체력이 엄청 좋은 건 아니지만 내면에 에너지가 넘쳐나서 가만히 있으면 좀 불편하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쓰임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마음을 먹으면 꼭 해 봐야 직성이 풀린다. 최근에는 보컬 트레이닝도 배우러 다녔다. 어렸을 때는 노래도 곧잘 불렀던 것 같은데 어느샌가 음정도 불안하고 목소리도 얇아지고 노래만 부르면 애들이 비난일색이다. 이것들 본때를 보여주자 싶어 보컬트레이닝도 배우러 다녔다. 생각해 보니 웃기다. 50 먹은 아줌마가 어디 노래경연대회 나갈 것도 아닌데 보컬레슨이라니……. 사실 내가 잘 부르고 싶은 노래의 장르는 트로트도 아니고, 스트레스 날리는 빠른 댄스곡도 아닌 가창력 끝판 왕 R&B나 호소력 짙은 발라드다.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를 잘 부르고 싶은 마음 완전 진심이다. 보컬레슨 다닌 건 아직까지 우리 가족 아무도 모른다. 아마 내 마음속 영원히 묻힐 비밀이 될 것이다. 보컬레슨까지 받은 노래 실력이 그거냐고 비아냥거릴 아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못한 게 무척이나 아쉽지만 앞으로 노래는 운전할 때 혼자만 부르기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나의 보컬레슨 도전기를 막을 내렸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 학원 라이딩을 하고 돌아오는 차에서 노래를 부른다. 앤의 혼자 하는 사랑, 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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