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자세히 말하자면 20대에 만났던 동갑내기 남자친구와 몇 년 동안의 연애 끝에 서로 소원해졌고 특별한 일이나 싸움도 없이 여느 때처럼 만나 같이 밥을 먹고 차 마시고 집에 왔다. 우리는 별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마지막 같이 먹는 밥이란 걸 둘 다 알았다. 집에 와서 꼬박 2박 3일을 잠만 잤다. 먹지도 씻지도 않고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방에서 자고 일어나 또 잤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몸이 개운해지고 생각이 정리가 되었는데 그때 들었던 생각이
'어차피 인연이라면 내가 애쓰지 않아도 다시 만나질 거야'였다.
심플했고 기분도 좋아졌다. 그 이후부터 평소에 말할 기회가 있다면 관계에 대한 나의 개똥철학을 저렇게 말하곤 한다. 구질구질 연연하지 않는단 말이다. 꽤나 쿨 하게 들려서 좋다. 어차피 이어질 인연이라면 물처럼 바람처럼 흘려보내고 스쳐 지나가도 또 이어질 거란 말이다. 이 만큼 살아보니 어느 정도 맞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쿨한가 연연하지 않는가 솔직히 그건 또 아니다. 말은 항상 저렇게 했지만 생각과 마음 깊숙이 들여다보면 태생이 사람 좋아하고 정이 많은 나는 지금도 궁금하고 보고 싶고 걱정되는 사람들이 많다. 또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이들은 얼마나 컸는지 안부를 물어봐주기 바라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혹여나 입었을 상처에 위로받고 싶고, 네가 너무 보고 싶었노라며 듣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누구 보다 연연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때때로 외롭다. 용기 내어 연락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잠깐씩은 들지만 쿨하지 못해 말아버린다.
인생에 큰 굴곡 없이 나랑은 또 다른 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우리 남편은 연애 초기에 말수가 그리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한테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을 하기보다는 듣기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공감능력이 떨어지거나 건조한 성격은 아니다. 가끔은 너무 답답해 보이기도 해서 왜 말을 많이 안 하고 듣기만 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직도 기억난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목도 안 아프고 더 편해. 그리고 여러 말 주절주절하는 것보단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툭하면 사람들은 더 좋아해.' 여우였다. 맞다. 사람들은 대부분 듣기보다는 자랑이던, 힘든 얘기 든 자기 말하는 걸 더 좋아한다. 연애 2년에 결혼 21년 차이니 23년을 봤지만 남편은 지금도 나가서 수다스러운 사람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나에게는 주절주절 몰아서 말이 많다. 나는 듣고 싶지 않은데 듣든 말든 자기 하고 싶은 때는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하면 가끔은 대나무 숲이 되어주고 일 안 하는 직원들 남편 대신해서 목에 핏대 세워가며 시원하게 쌍욕도 해준다.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흘깃 본 남편 깨톡의 갠톡이나 단톡에서도 어설픈 공감의 말이나 위로의 말도 과한 축하의 말도 잘 안 한다. 이유 없이 안부를 묻거나 연락을 취하는 것도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남편은 인기가 많다. 믿고 따르는 회사 동료 선후배들도 많다. 우스갯소리로 "내가 입만 뻥긋하면 큰일 날 사람들 많다" 그만큼 비밀이나 속사정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단 얘기다. 또 농담 같은 진담으로
"내가 누구든지 한 시간만 대화 나누면 속사정 다 알 수 있어, 어느 순간 나한테 다 얘기하고 있어."
맨날 주로 듣기만 하더니 우리 남편은 굿 리스너가 되었나 보다. 몇 해 전에 내가 물어봤다.
"당신은 사람이 아쉽지 않지?"
"응, 난 머 누구라도 알아서 무탈하게 잘 살아가겠거니 생각하는 거지"
남편은 딱히 외롭지 않단다. 그야말로 연연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쿨함의 정석이고 실체이다. 정말 부럽다. 이게 타고난 성격인 건지 자라 온 환경 때문인 건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다면 남편의 저런 면모를 우리 아이들이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강화쑥으로 만든 김포쑥떡라떼한잔씩 드링킹
오늘 오랜만에 오랜 지인을 만났다.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다곤 했지만 그래서 때로는 아쉬워도 흘려보내는 인연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고 싶은 인연에는 나름 연연하고 그 만남을 이어나가려 노력을 한다. 오늘 만난 동생이 바로 그렇다. 우리 아들 1학년 입학식에 만난 E는 우리 아들 바로 앞에 선 자기 아들 K가 뒤돌아서 장난을 치자 아이를 단속하며 연신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그 순간에는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장난꾸러기 아이는 우리 아들만으로도 족했는데 궁짝할만한 친구라니... 만만치 않아 보였고, 같은 반인게 달갑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은 머가 미안하냐며 누구랄 것도 없이 똑같은 애들이라고 했다. 강당에서의 입학식이 끝나고 각자 반으로 가서 1학년 담임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아직 학교생활에 미숙한 아이들과 엄마들을 도와줄 반대표를 뽑는 시간을 갖었다. 이때는 누구나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눈알을 굴려 노력하는 순간이다. 어쩔 수 없이 지목되거나 주로 경험이 있는 둘째 맘이 선생님이 부탁에 반대표를 억지로 맡게 된다. 그런데 K맘이 자진해서 손을 번쩍 들고 반대표를 자청했다.
'쳇!! 무슨 자신감이래.'
내가 할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첫째가 그 학교에 재학 중인 학부모였고, 당시 우리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서 교무행정업무를 보고 있는 교직원이기도 해서 순간 텃세 같은 마음도 들었나 보다. 어디 얼마나 잘하나 봐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너무 잘한다. 아침마다 엄마들 모여 있는 반 단톡에 준비물 시간표등도 살뜰히 올리고, 준비물 못 챙길 아이를 위해 넉넉히 여분을 준비하여 보내기도 한다. 날씨 이슈도 바뀐 학사일정도 미리 올려서 엄마들의 수고로움을 말끔히 해소하는 반대표였다.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담임선생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야무지고 잘할 수가 없다. 마치 반대표를 위해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어디 강남에 반대표 학원이라도 다니는 것처럼 잘했다. 그때부터 텃새(나만의 텃새이지 표시내진 않았다. 표가 났을까?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 겠다.)가 호감으로 의심이 관심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 초등입학을 하면 1학년 여자아이들은 반끼리 모여서 생활체육을 하고, 남자아이들은 축구팀을 결성해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엄마들은 돌아가며 간식을 준비했고 매주 모여 수다도 떨고 가끔 저녁에 벙개로 만나 맥주도 한잔씩 하며 돈독하게 우리도 한 팀이 되어갔다. 전투적으로 놀았던 것 같다. 재밌었다. 우리 반 축구팀 결성도 앞장서서 기관을 알아보고 준비했던 게 K맘 E였다. 뭐든 똑 부러지게 잘하는 예쁜 동생이었다. K는 같은 학교에 연년생 형이 있고, K엄마 E는 휴직 중인 초등학교 교사이란 걸 안 건 얼마 안 되어서였다. 맨날 놀이터에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나와있는 저 K엄마가 교사라고? 그 말을 전해준 지인에게 되물었던 것 같다. 어쩐지 너무 잘하더라니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K가 발달지연 아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이건 K맘에게 직접 들은 것 같다. 그제서야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그렇지만 이미 그때는 그런 것들이 별로 대수롭진 않았다. 이미 E는 배울 점도 많고 좋아하는 동네 동생이 되어버렸고, 가끔은 늦은 시간 나에게 다는 아니지만 속 깊은 얘기도 내놓아주는 것도 예뻤다.
초등 1학년때 만난 그 아이들이 지금 중3이 되었으니 세월 진짜 빠르다. 나는 살던 곳 죽전을 떠나 이곳 김포로 이사를 왔고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코로나19가 시작되어 몇 날 며칠을 집에서 나가지 못하고 지내야 하던 시절 종일 유튜브를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K맘이 시작한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당연 구독 알림 설정 좋아요 쌍따봉을 올려가며 열심히 챙겨보고 댓글 달고 응원하고 소통을 하고 그 채널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K 캐어 문제와 아이들 학습등의 문제로 신의 직장인 학교를 과감하게 그만두고 캐나다 1년 살기를 하고 있는 중에 생계형으로 유튜브를 개설하고 교육콘텐츠를 하나둘씩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E는 교사의 노하우와 엄마의 마음으로 단계를 밟아 채널을 키워냈고 지금은 수많은 책을 쓰고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인 스타작가가 되었다. 육아의 탑티어 오은영선생님과 나란히 더블 강의를 하는 명실상부 교육계의 아이돌 작가가 된 것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책이 나오면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하고 한 번은 내가 사는 김포 장기도서관의 요청으로 강의를 와서 반가운 만남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 E는 더욱 멋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사가 되어있었고, 각종 강의, 유튜브, 방송출연에 한동 안은 노력하지 않아도 소식을 알 수 있는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자격지심은 아니지만 왠지 바쁠 것 같아 연락하는 게 전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런 K맘이 오늘 우리 동네 강의를 왔다. 오랜만에 쏟아낼 수다가 한 트럭인데 허락된 시간이 강의 전 한 시간이란다. 아쉽지만 짧고 굵은 만남을 해야 했다. 그동안의 안부와 이런저런 얘기들 속에 E가 아이들 1학년 반모임날을 회상하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언니 기억나요? 그때는 휴직 중이라 소득도 없이 빠듯한 교사남편 월급으로 K이 치료비에 K형 교육비를 감당하며 아끼고 아끼며 살던 시절이었어요. 그날 나는 너무 떨렸고 반대표가 시원하게 커피를 쏘고 싶지만 형편도 안되니 각자 마실 음료를 주문해서 올라오라고 공지를 하고 동네 스타벅스에서 만남을 이어가던 중이었어요. 분위기 봐서 빵 정도는 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니가 오더니 파리바게트에서 빵을 한가득 사 와서 봉투에서 주섬주섬 꺼내며 나눠먹자는 거예요."
나는 기억도안 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거기가 빵도 파는 곳인데 내가 몰상식하게 다른 곳에 빵을 사갔단 말이야? 민폐네 민폐 "
이렇게 말하고 넘어갔다. 또 한 번은 누가 소풍을 갔는지 김밥을 쌌다며 K맘을 아침부터 초대했단다. 그때 당시 은영이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면역력이 떨어져서 얼굴에 고름이 가득 차고 홍조가 심해 집 밖을 나갈 수도 없고 가족 아닌 다른 누구와도 밥을 먹을 수 없는 시절이었는데 내가 뭐 어떠냐며 와서 먹으라고 불러서 우리 집에 와서 김밥을 먹었단다. 벌겋고 농이 가득 찬 얼굴로 유일하게 남에 집에 가서 먹은 밥이라고 했다.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하는데 뭔가 쑥스러워서
"김밥은 맛은 있었니? 맛도 없는 거 먹으라고 불러서 억지로 먹은 건 아니지?"하고 웃어넘겨버렸다.
나를 좋게 기억해 주니 고맙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들과 추억들이 소중하다. 정말 짧지만 굵은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도 못하는 만남을 뒤로하고 집에 와서는 하루종일 그 시절을 회상하고 아들과 기억나냐며 이야기도 하는 시간을 갖었다. 내가 노력해서라고 이어가고 싶은 인연과의 이런 만남은 인연일지 연연일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언제나 응원하는 빵 잘 사주고 김밥 싸줬던 착한 언니 같은 사람으로 오래 남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