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B형이다. 엄마를 제외한 우리 아빠도 내 동생들도 다 AB형이었다. 별다른 게 없었다. 초등시절 방학이 되면 긴긴 방학에 이벤트처럼 엄마는 개봉동에 사는 막내 이모 댁에 우리를 보내주었다. 우리 삼 형제 모두 가기도 하고, 어떨 땐 일주일 내가 먼저 가 있다가 돌아오면 동생이 또 일주일 가 있기도 했다. 지금 내가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며 생각해 보니 내 자식 한 끼 해 먹이는 것도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닌데 늦게 결혼해서 아들 하나 키우고 있는 이모가 일하고 있는 언니를 많이 도와준 셈이다. 어쨌거나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 이모네 집은 너무 재미있는 것 투성이었다. 넓은 마당에서 이모는 열무도 심고, 상추도 심고, 이것저것 심어서 뜯어먹곤 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작은 아파트에 살던 우리 집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훌륭한 소꿉장난 재료였다. 또 마당 한쪽 편에서 빨간 고무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하는 물놀이는 여느 계곡의 천연 워터 슬라이드 못지않게 즐거웠다.
이모는 재봉틀을 아주 잘했다.우리가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종일 마당이 보이는 거실에서 더 이상 입지 않는 이모 옷을 자르고 다시 이어 붙여 내 옷으로 만들어주었다. 브라운 체크무늬 모직 멜빵 원피스와 잘린 자투리 천으로 만든 세트 모자, 목 부분에 레이스가 달린 잔 꽃무늬 여름 원피스는 입었을 때 공주가 된 듯이 너무 좋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딸이 없는 이모는 결혼하기 전부터 나를 엄청나게 예뻐했고, 지금의 이모부랑 데이트할 때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한테 딸같이 대해준 딸 없는 이모한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일 재봉질하는 이모 옆에서 나는 이모 옷 이것저것도 입어보고 이모의 뾰족구두도 신어보며 패션쇼를 하였다.
또 이모 화장대는 이모파크의 클라이맥스 정말 최고의 재밋거리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총 천연색의 섀도와 립스틱이 있는 팔레트 하나만으로 종일 놀 수도 있었다.
물론 마지막 내 모습은 여러 색이 섞여 거무튀튀한 판다 눈과 조크같이 되어버린 입술이지만…. 그렇게 한번 이모 집 다녀오면 무료한 여름방학도 훌쩍 지나갔다. 이모는 나에게 이모이자 언니이자 친구이자 내가 젤 좋아하는 어른이었다.
이모가 사는 개봉동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광명 재래시장이 나온다. 거기는 또 구경거리와 맛난 간식거리가 한가득이었다. 종일 놀다가 저녁 무렵이 되면 이모랑 슬슬 걸어서 시장에 갔다. 시장에서 과일도 사고, 핫도그도 사 먹고, 저녁 찬거리도 샀다. 저녁때 시장구경도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무슨 가게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이모는 돈을 냈다고 하고 가게 주인은 받은 기억이 없다고 하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무서웠다. 무엇 때문에 이야기가 거기로 흘렀는지는 기억나지않지만 주인이 이모 성격이 이상하다며
혈액형이 뭐예요? A형이에요!!
이상했다. 이모는 분명 나랑 같은 AB형인데…. 이모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돈을 냈고 한참을 집으로 가다가 나한테 너무 화가 난다며 "다시 가서 따질까?" 하고 물었다. 딱히 내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 같진 않다. 나는 나대로 좀 당황스러웠던 게 '내가 좋아하는 우리 이모는 분명 나랑 같은 AB형인데 왜 갑자기 이모가 A형이 된 거지? 결혼하면 혈액형이 바뀌나?' 갑자기 나는 고민이 많아졌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나는 이모한테 물었다.
이모가 왜 A형이야?
AB형은 좀 창피하잖아. 누가 물어보면 이모는 그냥 A형이라도 대답해 버려.
그 당시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대답을 들어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AB형이 창피하다는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모랑 혈액형이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해 여름방학은 집에 와서도 한동안은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구나 한 명쯤은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가 있을 것이다. 나한테는 이모가 언제나 든든한 내편 내가 원하는 걸 어찌 알고 쏙쏙 다 해주는 나의 키다리 이모씨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의 추억 속 키다리아저씨도 궁금하다.
혈액형에 대해 잊고 살았다. 중학생쯤 되었을까 AB형이 독특하다, 돌아이다, 천재 아니면 바보이다. 등등 친구들끼리 심심풀이로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는 나도 혈액형 이야기가 나오면 굳이 어느 자리에서도 내 혈액형을 밝히진 않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