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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 Oct 04. 2024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애증의 영어

08.50에도 영어는 멈추지 않는다

“stupid!!!”

“soooooooorry, so sorry”


나는 라스베이거스의 트럼프 호텔 수영장 베드에 누워 세미나에 참석한 남편을 기다리며 한가로이 책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아이들은 실외 풀에서 비치볼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풀 한쪽에서 둘이 풀 붙인 듯 찰싹 들러붙어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외국인 커플 한 쌍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대체로 여유로운 오후 시간이었다.

갑자기, 여자가 우리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stupid!!"  

소리에 깜짝 놀라 다가가니 아이들이 놀던 공이 바람에 날려 그들 쪽으로 던져진 듯했다.  


'참~ 내~유난이다. 그게 그리 아이들에게 소리 지를 일인가?, 아이들을 안 키워봐서 저래!!, 중요한 시간 방해했다 이거냐?, 호텔에 방도 많은데….'  


은 말들을 속으로 쏟아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체감상 “sorry”만 백번은 한 것 같다.

한 번은  백화점에 쇼핑할 겸 구경을 갔는데 아이들이 둘 다 내 손을 잡으려다 보니 셋이 나란히 서서 백화점 입구를 통과하게 되었다. 밖으로 나오는 여자분과 아이들이 부딪혔나 보다.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얼마나 불라 불라 쏟아내던지 나는 또 "sorry "를 백번 했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어감과 톤을 들어만 보아도 직감적으로 그녀가 한 말들이 엄청 흉한 말들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아~ 나는 대체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해서 입만 열면 sorry를 연발하는가?' 정말 답답했다.  

LA 산타모니카 Pier

여행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비위도 약하고 진정한 프로 한식러인 아이들을 위해 캐리어 가득히 담아간 햇반과 김, 비비고 설렁탕, 김치찌개 등은 정말 유용하고 고마운 양식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국내선을 타고 LA로 넘어가던 중 LA 공항 검색대에서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딱 걸려버렸다. 검사원이 액체 묻은 솜 같은 걸로 김치찌개 겉면을 닦고 가방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는데 우리 막내아들은 김치찌개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NO~~~no” 이것만은 안된다며 울고불고 매달린다. 정말 아주 난감한 상황에서 최대한 초인적 언어능력을 발휘하여 우리의 자랑스러운 K푸드 대표주자 김치찌개에 관해 설명했다. 자세히 듣지도 않고 내가 할 말만 계속했던 것 같다. 다행히 인상 좋은 검사원이 웃으며 “OK, OK, Don't worry” 하는 거 아닌가? 대충 들어보니 본인도 김치찌개 잘 알고 있고, 좋아한다며 문제가 없을 거란다. 잠시나마 K푸드의 위상에 우쭐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내 이놈의 김치찌개를 제일 먼저 먹어 없애버려야지!!’ 하며 한국에서 싸간 마지막 일용할 양식을 싹싹 먹어버렸다.  

LA 헐리우드 사인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줄 요량으로 큰아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육아휴직을 하고 그때부터 아이들과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동남아의 섬들이나 휴양지들은 어차피 대부분 돈 쓰러 오는 여행객들이니까 누구나 상냥하고 친절하다. 영어로 개떡처럼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런데 미국 본토나 도시는 좀 다르다. 말도 엄청 빠르고 다시 말해달라고 하면 ‘내가 너한테 3번이나 말했잖아 잘 좀 들어봐라’ 하면서 짜증을 낸다. 어렵게 하고자 하는 말을 전달은 하지만 되돌아오는 체감상  마하 7의 속도감 있는 대답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안면근육에 마비 올듯한 애매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땡큐 땡큐”한다.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 그들은 아쉬울 게 없다. 아이들 데리고 진땀이 뻘뻘 났다. 실제로 그때 사진 속 내 모습은 대부분 천진난만한 아이들에 비해 잔뜩 긴장한 표정들이다. 그 즈음부터 영어 회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이 순탄하기만 하면 별문제가 없는데 문제가 생기거나 특히나 억울하거나 아이들과 관련된 일이 생길 때 정확하게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맨날 미안하기만 한 것도 지긋지긋했다. 영어로 유창하게 소통하고 싶은 갈망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간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아이들의 안전이 달린 문제 다 보니 게으름뱅이 엄마를 움직이게 한다.


 내가 처음 영어를 배운 건 정규과목으로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부터 영어는 좋았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학습영어와 실용영어는 간극이 매우 컸다. 대학 시절에도 영어 회화학원을 틈틈이 다녔다. 나름의 진심을 담아 과 친구들과 방과 후 맥주 한잔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학원에 가서 쇼미더머니에서 랩 좀 하게 생긴 젊은 원어민 흑인 선생님과 50분 회화 수업하고 다시 돌아가 마저 맥주를 마시곤 하는 열의를 보였다. 알딸딸 술기운에 용기가 한 스푼 더해져서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치는 뻔뻔함을 보이기도 한 듯하다. 한 번은 버스정류장에서 외국인들이 길을 묻길래 친절하게 잘난척하며 알려주었는데 차를 태워 보내고 보니 반대로 잘못 알려준 걸 깨달았다. 그 사람들 혹시 비행기 시간 놓친 건 아니었을까?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어글리 코리안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했을 듯싶다. 부디 목적지까지 잘 찾아갔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결혼해서는 방송통신대 영문과에 편입해서 4학년 마지막 학기까지 열심히 공부하긴 했다. 졸업하려면 졸업논문도 써야 하고, 토익점수도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꽤 높은 점수를 받아야 했는데 덜컥 첫째 아이를 임신했다. 입덧이 너무 심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임신 초기 10킬로그램이나 빠져버려 도저히 학업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방통대에서 공부를 마치지 못 한 체 흐지부지 아이들 키우고 시간이 지나버렸다. 지금도 가끔 친절한 방통대 총장님에게서 메일이 온다. ‘학우여 돌아오세요. 학업을 마치고 졸업하십시오’ 가끔은 못다 한 공부를 마무리해야 하나 하는 마음도 들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영어는 소통을 위한 실용 영어 회화이지 단어를 다 알아도 해석이 힘든 영문과의 고전문학이나 음운학 같은 것들이 아니니 과감히 미련을 버렸다.  


<<첫 원서읽기 모임 샬롯의거미줄을 다 읽고 기념샷>>

그 이후에도 어학원에서 어르신 대상으로 간단한 레벨테스트를 진행하여 왕초보 기초영문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원서 읽기, 필사하기, 마트 문화센터 원어민 수업강좌 듣기, 영어 회화모임 참석 등 다양한 시도로 영어 공부는 했지만, 꾸준히 지속되진 않아 아직 나는 요 모양 요 꼴이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은 시도를 했다. 영어는 나에게 첫사랑이자 애증의 관계인듯싶다. 잡힐 듯 잡을 수 없으니 더 갈증이 난다. 깔끔히 포기하고 싶은데 스멀스멀 또 발목을 잡는다. 올해 이것저것 다시 시작한 많은 것들 속에 영어 공부도 자꾸만 걸리는 것 보면 조만간 또 어떤 방식으로든 시작할 거 같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영어는 알면 알수록 할 게 더 많아지는 아주 고약한 특징이 있다. 그럴 때면 사기가 팍팍 떨어진다.  


요즘은 새로운 방식의 공부법도 많이 생겼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쿠팡 플레이, 티빙 같은 각종 OTT(Over-the-top:영화, TV 방영 프로그램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플랫폼이 생겨서 집에서 편하게 미드, 영드, 일드, 중드 등등 전 세계 모든 콘텐츠를 볼 수 있다. 자막이나 영어 스크립트 등도 친절하게 제공된다. 플레이 속도도 원하면 느리게 빠르게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이렇게 제공되는 콘텐츠를 이용하여 듣고 보고 따라 하는 섀도잉 학습법도 인기라고 한다. 이 학습법은 유튜브 영어 관련 강의를 조금만 검색해도 다양하고 친절하게 유튜버들이 알려준다. 또 화상 채팅으로 전 세계 선생님의 학력 수준과 이력 출신 나라 등을 보고 선택해서 굳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지 않아도 대화하며 회화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이것도 떨리고 힘들면 상황별, 수준별로 AI와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어플도 다양하게 제공된다. 최근에는 더 진화된 인공지능챗봇 ChatGPT가 화두다. 대화상대, 성별, 상황 모든 걸 내가 세팅할 수 있다. 영어로 대화하고 난 후  대화내용까지 스크립트로 제공되어 복기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맘에 드는걸, 골라서 공부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졌다. 더 이상 영어 공부를 하는데 방법이 어렵거나 여건이 안 된다는 핑계가 안 통하게 생겼다. 다만 나에게는 더 이상 문제가 생겼을 때 보호해야 할 꼬꼬마였던 아이들이 없다. 언제 저렇게 큰 건지 고3 큰아이는 곧 수능을 보고 몇 개월만 지나면 성인이 될 것이고, 중3 둘째 아이도 나란히 서서 대화를 오래 하려면 내 목이 꽤 아플 만큼 커버렸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는 영어 회화 공부는 나만을 위한 공부가 될 것이다. 나는 안다. 긴 호흡으로 해야 하는 공부가 맹목적으로 섣불리 시작한다면 얼마 못 가 실패할 확률이 크다는 걸. 그럼 나는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가 생긴 것 같다. 외국에 어느 길목에서 우쿨렐레 거리공연을 해야 하나? 도저언!!! 요즘 50을 바라보는 나와 같은 평범한 주부들이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있다면 뭐 때문에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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