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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 Sep 06. 2024

엄마라는 단어의 무게

04. 우리 엄마 오마주

JTBC 예능 프로그램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꽤나 묵직하게 돌덩이처럼 남아 한 번씩 내 뱃속을 꾹 눌러 아리다. 이효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다. 사느라 바쁜 엄마는 주변 지인 친구들 다른 사람들은 다 이미 가본 경주의 첨성대도 천마총도 불국사도 보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보질 못했으니 먼저 다녀온 친구들 대화에 호응도 못하고 끼지도 못했단다. 톱스타 이효리의 엄마가 여든이 다 된 나이에 가보고 싶다는 여행지 치고는 참 소박하다. 가난한 삶에 4남매를 돌보느라 바쁜 엄마는 귀여운 막내딸 효리에게 시선과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그리 많이 허락되진 않았으리라.

<사진출처 Jtbc 엄마,단둘이 여행 갈래?>


당장 먹고사는 게 급급했던 그 시절 가족들 한 끼 굶기지 않고 배부르게 먹이면서 고단한 보통의 또 하루를 도장 깨듯 살아 냈으리라. 하지만 욕심 많은 막내딸 효리는 엄마에게 맘껏 응석도 부리고 싶고, 인형도 사달라고 조르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눈치 빠른 효리도 막내지만 누구보다 엄마의 처지를 짐작하고 그 모든 것들은 깊숙이 담아두었던 듯싶다. 여행을 하면서 효리는 그 시절 엄마를 엄마는 어린 효리를 어르만져주는 듯했다. 마치 곪아버린 상처에 대충 덕지덕지 발라 누덕진 밴드를 다시 떼어내서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힐링이 되어가듯 쓰라리지만 한 번을 겪어내야 새 살이 돋는 과정 같았다. 2화에서 효리는 어린 시절 자주 먹었던 추억의 오징엇국을 엄마에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엄마는 집에서 직접 공수해 온 양념으로 그 시절 맛을 재현해 내어 국을 끓여주었다.

효리는 그 국물 한수저에 뭉쳤던 응어리가 녹아내리듯 눈물이 터져버린다. 효리가 엄마에게 '왜 오징엇국이었어? 그 시절 내 그릇엔 오징어 몇 마리 들어오지도 못했어.'라고 하자 엄마는 많은 식구 먹이려면 오징어 한 마리로 국을 끓일 수밖에 없었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방송을 볼 당시에 어린 효리가 가여웠다. 속으로 얼마나 내 국그릇에 국자에 얻어걸린 오징어가 많이 딸려오길 바랐을까... 그런데 이 방송을 본 어느 시청자가 남긴 후기 글 '그 시절 엄마의 국그릇엔 오징어가 한 마리라도 들어갔을까요......?'에 나도 눈물 콧물이 터지고 말았다.  


슈퍼스타 이효리는 나와 같은 세대이다.


슈퍼스타이지만 표현방식이나 소통방식이 꽤나 진정성이 있어서인지 동시대 넉넉하지못한 집에서 자란 동질감이 나와 닮았다. 어디 당대 최고 슈퍼스타와 나를 비교하겠냐만은 그만큼 이효리의 진솔하고 솔직함이 좁혀 낸 나 혼자만의 내적 거리감이다. 이게 이효리의 큰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프로그램초반 엄마와의 거리가 좁혀질까 싶었는데 마지막엔 엄마를 더욱 사랑해 주고 잘해주고 싶단 고백에 나도 울 엄마가 많이 생각났다. 나도 맘은 쓰이는데 맘처럼 행동은 잘 못하는 딸이다. 맘처럼 표현도 행동도 잘 못해서 항상 또 맘쓰이기를 반복하는 꼭 뫼비우스 띠 같은 도돌이표이다. 그리 넉넉지 못한 형편에 어린 시절 나도 오징엇국 많이 먹었었다.


미역줄기볶음, 무말랭이무침, 콩장, 육즙 가득 고기 넣은 동그랑땡이 아닌 참치 넣은 동그랑땡은 내 도시락 단골 반찬이었다. 나도 한 번씩 생각나고 먹고 싶은 국, 반찬들이다. 그런데 우리 식구들은 남편도 아이들도 아무도 안 먹는다. 우리 남편은 오징어국, 미역줄기볶음 같은 거 안 먹고 자랐단다. 쳇!! 좀 살았다는 거냐? 아이들도 맛이 없단다. 희한하다. 하긴 요즘은 너무나도 맛있는 것들이 차고 넘치니 또한 나에게 있는 음식이 주는 아련한 추억이 그들에겐 없으니 그런데 마음 한켠이 아쉽고 서운하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또 울 엄마의 딸이다. 엄마를 보고 나를 본다. 엄마를 보면 내가 보인다. 한없이 답답하기만 해 보이는 엄마인데 엄마처럼만 살라고 하면 나는 자신이 없다. 우리 엄마는 생활력 강하고 똑똑하다. 음식솜씨는 장금이가 환생한 듯 우리 딸 말을 빌어보면 이 맛을 못 본 사람들이 불쌍타. 이 마음은 나도 이해가 된다. 우리 외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 음식을 우리 딸이 못 먹어봐서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별거 아닌 소박한 반찬이었지만 점심시간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을 때면 도시락 반찬 뚜껑을 여는 순간 우리 엄마 반찬이 젤 먼저 소진되었다.


엄마는 순발력도 좋아 학창 시절 배구도 하고 운동신경도 나름 남다르다. 센스도 있고 안목도 높은 데다 자존심도 센 편이다. "엄마는 요리연구가가 되었어야 해!! 그럼 빅마마 이혜정요리 연구가 보다 더 히트였을 건데..." 내가 맨날 하는 소리다. 초등학교 시절엔 하교를 하고 온 나에게 엄마가 건넨 쪽지가 아직도 기억난다. 동네 쇼핑센터에서 수입상품점을 하셨던 엄마는 상인들에게 대여하는 이동식 서점에서 책을 빌려 독서를 하였는데 책 내용 중에 큰딸인 나에게 읽어주고 싶었던 구절이 있었는가 보다. 잊히기 전에 종이 또는 휴지에 메모해서 두었다가 건네곤 했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상황과 쪽지 사이즈 모양은 생생하다. 그 상황이 비록 장사를 하고 있는 엄마지만 나는 좋았나 보다. 우리 엄마도 이효리 엄마처럼 T 성향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고단한 삶이 어깨에 내려앉은 무게 때문에 대문자 F였던 엄마를 T로 만들어 버린 듯도 하다. 그 시절 말랑감성으로 버티기엔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외면하고 감정을 닫아버리는 게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시작한 장사는 내가 대학교 2학년 때까지 했으니 나중에는 질려버려서 물건 처분도 안 하고 몇 날 며칠을 가게문도 안 열고 잠만 자다가 그러기를 한두 달 후 며칠 만에 물건들을 염가처분하고 가게를 닫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갱년기가 아니었나 싶다. 엄마는 일주일에 두세 번 숭례문 수입도매상가로 새벽에 물건을 사러 가셨다. 부천에서 다녔으니 꽤 거리가 있었는데 물건을 잔뜩 사고 되돌아올 때 택시비 아끼려고 짐가방을 이고 메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들어오기도 했다.

엄마가 새벽시장을 갈 때면 나는 동생들을 깨워 채비를 하고 등교를 했다. 한 번은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는데 부천역에서 무거운 짐가방을 잔뜩 들고 나오는 엄마가 보였다. 버스에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앗 하고 반가워 손이 올라갔는데 이내 모른 척했다. 친구들이 뭐냐고 물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물론 나는 버스 안에 있었고 엄마는 저 멀리 맞은편 길 건너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서 아는 척할 수도 없는 거리였지만 친구들에게 엄마를 봐서 반가웠다고 자세히 말하지는 못했다.

누가 봐도 우리 엄마였다. 엄마가 시장에서 물건을 해서 그날 장사를 하려면 늦어도 새벽 5시에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 이불속에 있어도 한기가 들어오는 한 겨울 그 시간 새벽은 살이 애는 추위였겠지만 물건을 사고 짐을 들고 오다 보면 땀이 나고 짐도 무거우니 입고 있는 옷의 무게라도 줄여야 했으리라. 엄마는 패션과 기능 따위는 생각도 않고 얇은 형광 노란색 패딩점퍼를 입고 새벽시장을 다녔다. 1킬로 밖에서도 엄마를 알아볼 수 있을 그런 색의 점퍼에 머리도 오래 펌을 지속하기 위해 어찌나 빠글빠글하게 말았는지 한눈에도 엄마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울 엄마 나이 지금의 나 보다 어렸을 때인데...... 이런 엄마가 엄마이면서 포기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엄마라는 단어를 무게로 잴 수 있다면 얼마쯤 일까? 나에겐 함부로 추정할 수 없을 만큼 어쩔 수 없이 너무 무겁다.  짓누름에 부담스럽고 벗어나고픈 무게가 아니고, 튕기지 못하게 딱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의미 있는 무게이다. 대낮인데도 초저녁처럼 어둡고 하루종일 장맛비가 내리는 오늘은 하루 종일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젊은 시절 울 엄마가 너무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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