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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 Aug 30. 2024

나의 버킷리스트

03. 나의  버킷리스트

태풍이 온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이른 아침 병원에서 정기검사를 하고 신관 2층  파스쿠치 구석에 앉아서 음악도 듣고 책도 보며 검사결과를 기다린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딴 세상에 온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병원에 도착해서 검사하기 전까지 세상 불편하고 우울한데, 검사하고 난 후 이 자리 왜 때문인지 좋은 건 아이러니하다. 2년 전 진단받은 신부전증 때문에 나는 2, 3달에 한 번씩 신장내과에서 피검사, 소변검사를 하고 약을 먹으며 혈압과 단백뇨등을 조절하고 있다. 이제는 무뎌질 법도  한데 아직 나는 나의 병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보다. 병원 가기 며칠 전부터 초조하고 기분이 별로다. 그런 병원 행을 한 번이라도 덜 가려면 될 수 있는 한 일찍 검사를 하고 그날 검사결과를 듣고 와야 한다.  좋아지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유지 만으로도 본전인 결과지를 마치 2 ,3달 시험결과 통지표 받듯이 확인하고 돌아가면 그럼 다음 검사까지 그럭저럭 잠시 잊고 살아진다. 어쩔 수 없이 서너 시간을 카페 한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책도 음악도 지루해지고 둘레둘레 주변을 보면서 아픈 사람 아픈 사람 가족 의료진 구경을 실컷 한다. 옆 테이블은 팔에 링거 3개를 주렁주렁 꽂은 20대쯤 되어 보이는 환자복입은 이쁜 딸과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엄마가 끊임없이 도란도란 대화를 하고 있다. 환자복을 입었어도 번쩍번쩍 크고 화려한 액세서리와 샛노란 탈색머리가 아프기 직전까지 얼마나 생기 있는 삶을 살고 있었을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대화의 주제는 친구이야기 가족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주절주절 고3 우리 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앞 테이블엔 80세는 훌쩍 넘어 보이는 기력이 없어 눈도 못 뜨시고 휠체어에 앉아있는 노모와 내 나이보다 너 다섯 더 돼 보이는 딸이 끊임없이 엄마에게 두런두런 말을 시키며 요거트를 떠먹여 준다.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는 딸과 한 입도 안 먹고 싶은 엄마의 실랑이 속에 엄마가 병상이라도 깨끗하길 바라는 마음에 따님은 요거트 한입 주고 입 한번 닦아주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에 나는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습기가 차오른다.  

두 쪽 다 맘 한켠이 아리다. 갑자기 아픈 게 딸이 아니고 엄마가 아닌 나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몸과 마음이 건강한 딸과 항상 나를 위해 기도를 하시는 엄마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뭐든 잃고서야 소중함을 아는 우매함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잊지 말자!!!  


버킷리스트(bucket list):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적은 목록.


내가 아프고 보니 요즘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버킷리스트는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었다. 왠지 우울타. 그런데 얼마 전에 시작한 우쿨렐레 덕분에 나에게 버킷리스트가 하나 생겨버렸다. 우쿨렐레 잘 치는 할머니. 할머니라고 했으니 나에게 허락된 시간도 길다. 버킷리스트가 하나 생겼는데 벅차오른다. 앞으로 채워질 리스트 목록도 기대가 된다. 매 순간이 엮어져 삶이 된다면 그 삶이 풍부해진 느낌이다. 이제야 버킷리스트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건 끝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To do list가 아닌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고 희망을 제시하며 하나씩 지워가는 To do list라는 것을. 먼 훗날 멋지게 해 낸 버킷리스트들을 하나씩 지우는 내 모습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또 멋지게 해내지 못하면 어떠하랴? 분명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을 만끽했을 것이다. 꼭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을까? 미완인 채로 남은 것도 있을 것이고, 하면서 수정되는 행보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잘하는 것보다 오래 하는 것.  꼭 잘하려다 보면 힘이 들어가 그르치고 틀어진다. 힘을 좌악~빼는 게 진정한 고수 롱런하는 지름길. 이제는 잘하는 사람보다 진득하니 오래 하는 사람이 젤 부럽다. 뭐든 잘하려다 보면 시작이 어렵다. 어려워 미루다 보면 시작은 수없이 좌절된다.  


그렇게 좌절된 수많은 시작들을 모두 도전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용기를 내어 시작한 또 다른 버킷 중 하나가 바로 글쓰기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며 꼭 한번 책을 써보자는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요즘은 말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훨씬 좋아졌다. 글은 뭔가 따뜻하고 힘이 있으며 무겁다. 훌훌 공중에 흩어지지 않는다. 남겨진다. 처음엔 이것 때문에 글쓰기를 주저했다. 남겨진다는 건 내 무식함이나 습자지 같은 얕은 지식, 약점이 들통날 수 있다는 점이 두려웠다.


그런데 막상 써보니 두려움쯤은 생각도 안 난다. 어차피 나만봐도 상관없는 나를 위한 글쓰기라서 인지 남을 의식하기보단 내가 더 소중타.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생긴 버릇 중 하나가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찰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었나 옷 색 매칭은 촌스럽지 않은가, 액세서리는 어울리나, 헤어스타일은 세련되었고 날씬한가 뚱뚱한가 등만 봤다면, 지금은 사람들의 표정 손짓 몸짓등이 보인다. 신기하다. 나는 며칠 전에 혜화동에 연극을 보러 다녀왔다. 장마철이라 비도 많이 오고, 김포댁 오래간만에 서울 나가는 길이라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나갔다. 종로 3가쯤에서 신호대기로 버스가 꽤나 오래 서있었다. 대로변 스타벅스에서 30대 초반 즈음의 왜소한 남자와 20대 중 후반쯤 되어 보이는 키가 1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나왔다.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지는 가보다. 20대 청년이 꾸벅 인사를 하고 아쉬운 듯 형님에게 어린아이처럼 포옥 안긴다. 형님은 연신 등을 두들겨주고 파이팅의 제스처를 한다.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대여섯 번이나 더 하고서는 발길을 돌린다. 가다가도 두어 번 뒤돌아 보고 인사를 한다. 그 모습에 괜히 잠깐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저렇게 큰 청년도 믿을만한 누군가에게 안겨 위로 응원 격려가 받고 싶구나. 잠깐 미소가 지어졌다. 김포에서 혜화동까지 한 시간 사십 분을 꼬박 버스 의자에 앉아 있느라 엉덩이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오늘의 플레이 리스트 '동물원의 혜화동' 무한반복 들으며 창밖 풍경도 보고 마치 긴 여행 같았다.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예민함은 어쩌면 감각이 최고로 발달했단 뜻 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보이는 저런 것들이 누구에게나 다 보이는 건 아닐 테니깐. 나는 무엇에게든 무심하지 않고 세심하다. 이게 나의 강점이기도 하고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또 남에게 배려가 되기도 하고 남을 힘들게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예민함을 더 이상 천덕꾸러기처럼 여기진 않기로 했다. 바뀌어진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니 시선이 멈추어 버린 시점에 예민함도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게 크게 다가온다. 어차피 끝까지 함께 할 성격일 테니... 잘 갈고닦아 어마어마 한 위력을 지닌 나만의 아이템으로 만들어야겠다. 아이템 장착한 나의 다음 도전 버킷은 무엇이 될까?


오늘은 살아가는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인가 그 리스트가 생긴 스토리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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