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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에서 만난 해피엔딩

Defying Gravity, 혜화동을 떠올리다

by 지언 방혜린

최근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6관왕을 차지하며, 한국 공연예술의 저력을 전 세계에 다시 한번 알렸다.

토니상은 미국 브로드웨이의 연극, 뮤지컬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 시상하는 세계적 권위를 지닌 시상식으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극본상, 작사·작곡상, 작품상, 연출상, 남우주연상, 무대디자인상 총 6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창작 뮤지컬로, 국내에서는 2016년에 초연했다. 지난해 11월 뉴욕 맨해튼 벨라스코 극장에서 정식 개막하며 브로드웨이에 진출에 성공해 호평을 받아 왔다.

K팝, K무비, K드라마, K문학에 이어 이제는 K뮤지컬까지.

한류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전 세계에 공감과 울림을 주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하게 다가온다. 자주는 아니지만 해외에 나갈 때면 이런 흐름을 어렵지 않게 체감하게 된다.

지난 2월, 호주 블루마운틴 인근 로라마을의 한 작은 독립서점에서 한강 작가의 책을 발견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곳 직원은 한강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그곳에서도 작가의 책을 찾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마치 내 책인양 어깨가 좌악 펴지는 느낌이었다.

비록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여기 있는 모든 작가님들도 이 글쓰기의 끝이 어쩌면 해피엔딩일 수도 있을까 하는 달콤한 상상도 해보았다.

한국에서 출발이 아침이었는데 미국에서 도착이 아침.

꼬박 12시간을 날아 도착한 미국 John F. Kennedy 국제공항은 입국수속을 하는데도 빠릿빠릿한 한국과는 많이 달랐다. 그렇다고 딱히 느린 것도 아니지만 뭔가 아쉬울 게 전혀 없다는 웃음기 쏙 빠진 무표정과 ‘나는 나만의 속도가 있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한 빠르기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다리 좀 뻗고 쉬고 싶은 마음 한가득인 나만 속이 터져나간다.

결국 두 시간 가까이 줄을 선 끝에야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뉴욕 맨해튼 한가운데 입성하였다.

여러 번 미국을 갔었지만 뉴욕은 처음이었다.

뉴욕의 첫인상은 좀 더 크고 더 바쁜 우리나라의 명동 같기도 하고 영화 속에서 자주 봐서 그런지 친숙하기도 하면서 낯선 느낌이랄까? 사실 처음엔 내가 뉴욕에 와 있다는 게 비현실 적이라 별 감흥이 안 느껴졌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니 고개가 등에 닿아야만 그 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쭉 뻗은 뉴욕 건물들 사이로 금방이라도 스파이더맨이 줄타기를 하며 나올 것 같았다.

여행 떠나오기 전에 유명 영화 속에 나온 뉴욕의 장소들을 소개하는 책 ‘영화 속 뉴욕 산책’을 읽었는데 곳곳이 영화 속 장면과 오버랩되어 심장이 마구 떨려 설레었던 기억이다.

싸이와 유재석이 강남스타일 공연을 했던 타임스퀘어 광장을 가로질러 누가 봐도 여행객인데 내 마음만은 뉴요커처럼 도시를 할부하니 그 순간만큼은 피곤함도 잠시 잊게 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한 후 짐을 막 풀고 나니 그제야 피곤이 밀려와 내 눈커플이 100톤쯤은 되게 느껴졌다. 허기조차 느낄 세 없이 그대로 자고만 싶었는다. 남편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꿈속에서 하는 말인지 진짜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잠에 취해있었는데 흔들어 깨우는 통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듣고야 말았다. 공연을 예약해 놨으니 한 시간 정도 후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제야 여행을 준비하던 시간들 속에 남편이 지나가듯 던진 말들이 기억이 났다.


“뉴욕 간 김에 공연 봐야겠지?"

"라이언 킹이 좋겠어? 위키드가 좋겠어?"

"시차 빨리 적응하려면 바로 움직이는 게 낫겠지?”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라버렸다.

그 순간 내 입속에선 나올랑 말랑 대기하고 있던 혓바늘 서너 개가 항의하듯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쩐지 미국 도착 몇 시간 전 기내에서 생전 안 보던 장르의 영화 ‘위키드’를 열심히 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남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내 탓도 있었지만 갱년기를 정면으로 맞이하고 있는 50대 아줌마의 저질체력은 욱 버튼이 눌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성의를 봐서 설악산 흔들바위같이 무거운 내 몸띵이를 이끌고 나는 다시 남편을 따라 호텔을 나섰다.


요즘은 구글 맵이 워낙에 잘 되어 있어 해외 어디를 가도 웬만한 곳을 찾아가는 건 수월한 편이다.

다만 가끔 헷갈리는 게 거리 단위가 km가 아닌 마일(mile)이라는 점이다. 숫자만 보고 무작정 걸어서 찾아가다 보면 지친 몸이 지친 마음을 끌어내기 마련이니 잘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우리 숙소에서 위키드를 공연하는 극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택시를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를 마냥 걸으면서 뉴욕 중심가 이곳저곳을 본격적으로 눈에 담아 보았다.

금요일 저녁 타임스퀘어광장은 우리나라 한강의 세계불꽃축제할 때만큼이나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모인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그곳을 다시 지나려니 괜히 나는 아무나 붙잡고 "싸이 알아요? BTS 알아요? 오징어게임 알아요?" 묻고 싶을 정도로 또다시 흥분되었다.

그리고 다다른 극장 ‘아! 혜화동이 아닌 브로드웨이에서 드디어 뮤지컬을 보는구나’ 싶어 더 기대가 되었다.

라이언킹, 오페라의 유령과 함께 뉴욕 브로드웨이 3대 뮤지컬 중 하나로 평가받는 위키드(Wicked) 역시 토니상, 그래미상등 100여 개의 수상을 한 뮤지컬이다. 아이들과 영화로는 봤지만 실제로 나는 이 작품을 언젠가 꼭 브로드웨이에서 보리라는 마음으로 한국 내한 공연 때 아껴두고 보지 않은 작품이었다. 올 7월에 13년 만에 다시 내한공연을 한다고 하니 무대연출이나 음향 등등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을듯하여 보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인다.

뉴욕 위키드가 공연되는 거슈윈극장은 브로드웨이 극장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극장이다. 극장을 들어서니 예상은 했지만 오래된 극장의 고풍스럽고 살짝 올드한 느낌을 풍기는 실내가 오래된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큰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금요일 저녁 공연은 거의 만석이었다. 공연 시작 전 위키드 바에서 주스를 한잔 샀더니 위키드전용 플라스틱 컵을 함께 줘서 기념으로 가져와 호텔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공연은 두 주인공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을 다룬 스토리로 주인공들의 외모의 대비가 컸지만 각자의 매력으로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1막에서 주인공 엘파바가 기구 위에 올라 타 날아오르며 부르는 ‘Defying gravity’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래비티는 남들과 다른 엘파바가 자신을 압박하는 현실을 비유한 것이다. 현실이라는 중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오르며 절규하듯 부르는 노래가 압권이었다.


"한계는 무너졌어, 내 길을 갈 거야. 시도하기 전엔 그 누구도 알 수 없어."

“이제는 중력을 벗어나, 날아올라, 날개를 펼칠 거야. 날 막을 순 없어.”

위키드(Wicked)의 Defying gravity의 가사


위키드 공연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노래가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력하고 가사와 멜로디가 중독성이 있어 오래 남아 흥얼거려졌다.

그 외에서 공주 같은 글린다가 부른 ‘Popular’와 엘파바와 글린다의 듀엣곡 ‘For Good’도 우정과 성장 그리고 이별에 대한 내용이 잘 표현된 아름다운 곡이었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 공연 수준도 많이 업그레이드되었고, 노래도 잘하는 실력파 배우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본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더 기대를 걸었지, ‘위키드’ 그 자체에 큰 기대를 하고 본 건 아니었다. 막상 본 공연은 단순히 노래와 연기가 넘어 그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다소 과장된 듯 하지만 공연과 잘 어우러지는 풍부한 정서와 감정선, 그리고 문화적 디테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무대였다. 적극적인 무대 연출로 입체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킨 표현방법,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 관객과의 호흡에서 확실히 우리나라와는 다른 결이 있었다.

중간에 살짝 졸음이 몰려올 때쯤 절묘하게 등장한 인터미션 덕분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는데, 공연장의 규모가 큰 만큼 화장실 줄도 끝이 안 보이게 길었다. 다행히 관객의 동선을 안내하고 순서를 도와주는 직원들이 있어서 긴 줄도 빠르게 정리되어 시간내에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극장 운영과 공연 경험의 일부로 느껴졌다.

위키드는 그 명성에 걸맞게 멋진 공연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뮤지컬 공연이 그게 뒤지거나 경쟁력이 없다고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십 년쯤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보았던 태양의 서커스, “오쇼”, “KA 쇼” “Le Reve쇼”나 마이클젝슨쇼등은 우리나라의 공연과 괴리가 심해서 꼭 그곳에서 보아야 할 명분이 있었다면 (물론 지금도 독보적인 공연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나라의 어쩌면 해피엔딩이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차고도 넘쳐 보였다. 브로드웨이에서 자랑스러운 한국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볼 수 있을 기회였는데, 내가 뉴욕에 다녀온 직 후 수상을 하게 되어 현지에서 기쁨을 같이 할 수 없었음이 아쉽다.


“브로드웨이에서 위키드를 본 날, 나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가능성을 보았다.”

한류는 이제 더 이상 소비되는 문화가 아니다. 공감하고 울림을 주는 ‘주체적인 이야기’로, 세상을 움직이고 있었다. 전 세계인들이 미국의 뮤지컬을 즐기기 위해 브로드웨이 42번가를 찾듯이 어쩌면 해피엔딩의 미국입성과 이번 수상으로 우리나라의 뮤지컬을 즐기려 혜화동으로 구름 떼처럼 몰려올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대해 본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10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타임스퀘어광장은 무슨 연말 축제 같은 분위기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나도 사진 몇 장을 담아 보고 무릎까지 내려간 다크서클을 쓸어담으며 이미 마비된 듯 감각이 없어져버린 다리를 달래 숙소도 빨리 복귀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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