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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시 시드니동 가평길 (Kapyong St.)

가평전투를 아시나요?

by 지언 방혜린

평일 낮, 시드니 시내를 지나던 중 우연히 태극기를 보게 되었다.

외국에 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우리나라와 마주치면, 낯선 풍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지속되었던 긴장감은 익숙한 편안함으로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잠시 허물어진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고, 곧이어 궁금증이 뒤따랐다.

왜 이곳 시드니 시내 한복판에 태극기와 호주 국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는 걸까?

그 답은 '가평 전투(Battle of Kapyong)'에서 찾을 수 있었다.


6.25 전쟁 당시, 한반도 곳곳에서는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가평 전투'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여전히 전쟁의 위협 아래 놓인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억 속에서 6·25 전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글짓기, 포스터, 표어 등 다양한 반공 활동이 학교 교육에 깊숙이 스며 있었다.

또 토요일 오전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친 이승복 어린이의 영화를 학년별로 학생들을 강당에 모여놓고 단체관람 시켜주기도 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어린 나이에 꽤나 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던 기억의 영화였다.

이곳 김포에 이사 올 당시 우리 아이들이 전학 오게 될 초등학교를 사전에 둘러보러 들렀다.

이 학교는 1946년에 개교한 학교로 학교에 이승복어린이의 동상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를 둘러본 후 이승복어린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던 아이들은 동상을 보고 나에게 와서 학교에 어린 왕자 동상이 있는데 망토를 입고 있지 않다고 했던 웃지 못할 일이 생각난다.

자유와 평화를 중시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아마도 우리 세대를 마지막으로 그런 교육은 점점 자취를 감췄다. 요즘 아이들은 6·25 전쟁을 역사 시간에 잠깐 배우는 정도이고,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그마저도 모른 채 지나치기 일쑤다. 외부에서 보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 수위가 높은 우리나라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작 ‘전쟁 불감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나조차도 생각이 많아졌다.


가평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경기도 가평에서 벌어진 전투로, 유엔군 소속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군이 중국인민지원군과 맞서 싸운 전투이다. 제27보병여단은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가 위치한 가평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사창리 전투에서 후퇴하던 대한민국 제6사단 병력의 뒤를 따라 중국군이 이 지역에 침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끝까지 진지를 지키며 격렬한 저항을 이어갔다. 결국 중국군은 4월 25일 가평 북쪽으로 철수했고, 이 전투는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캐나다군의 활약은 중부 전선에서 유엔군의 방어선을 지켜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전투에서 호주군은 31명이 전사하고, 59명이 부상, 3명이 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이 막아낸 전선은 유엔군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전황을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평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캐나다군이 한국전쟁 중 수행한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된다.

(출처 : 네이버 위키백과)

시드니 한복판에서 마주한 태극기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과 남의 나라 전쟁 속에서 애석하게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가 당연한 것처럼 누리는 이 평안과 안락함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또한 나의 무사와 안녕이 이름도 모르는 호주 젊은이들의 목숨값으로 빚졌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지 못했던 것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6.25 한국전쟁을 비롯해 1,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등 수많은 전쟁터에서 싸운 호주의 용사들은 대부분 ‘젊다’는 표현보다 ‘어린’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학생, 군인, 청년들이었다. 호주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교육을 통해 세계 평화와 휴머니즘, 인간의 존엄성, 개인의 영예의 가치에 대해 배우며,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도 외면하지 않고 참전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구 반대편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 전쟁이 났다는 이유만으로, 연합군에 참전을 허락한 호주 정부와 군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70년 넘는 세월 동안 그 희생과 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모습에 숙연해졌다.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 보니, 한국전쟁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역사라는 점이 새삼 다가왔다. 호주 전역에는 가평이라는 이름을 붙인 길 10개와 다리 2개가 있다고 한다. 머나먼 타국 호주에서조차 6.25 전쟁의 가평전투를 기리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며, 정작 '우리나라에선 가평전투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최대의 예의와 존경을 갖춰 한결같이 희생한 군인과 전쟁을 마주하는 호주정부와 개인의 모습이 우리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어 아쉬움이 많이 들었던 기억이다.


며칠 전, 6월 6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서 희생한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현충일이었다. 1년 365일 중 하루만 형식적으로 기억하는 의례적인 추모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늘 마음 깊은 곳에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태도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 한번 바라보며 내가 누리는 이 평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잊지 않도록,

오늘도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고개 숙여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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