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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Gallery of NSW

예술이 일상이 되는 삶이기를...

by 지언 방혜린

한 나라의 문화를 향유하는 양상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나 ‘관심’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의 여유, 경제적 능력, 교육 수준, 지역 인프라, 사회 분위기 등 다양한 제반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만 해도 연주회를 가고, 미술관을 방문하고, 공연을 보러 가는 일들이 오랫동안 돈 많고, 배운 특정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특별한 전시를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는 일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림을 보러 가더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감동으로 다가오기 어려웠고, 평소 잘 입지 않던 옷을 나름의 예의를 갖춰 챙겨 입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낯선 작품들 앞에 서 있곤 했다. 눈으로 그림을 보고 있지만, 머릿속은 멍하고, 마음은 그 자리에 닿지 못한 채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작품을 감상한 여운보다는 어떤 이질감이 더 강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내 삶과는 거리가 먼, 남의 세상을 잠깐 들여다본 듯한 낯선 느낌이랄까.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전의 나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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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조금 달라졌다. 좋은 것 중 하나는, 어쩌면 뻔뻔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이 여유는 시간이나 돈, 혹은 지식의 유무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것이다. 나의 방식대로 문화를 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고, 모든 것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느긋함이 생겼다.

이제는 미술관에 가서 하나의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는 일이 어색하지 않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어떤 날은 색감 하나에 오래 머물고, 어떤 날은 흔들린 선이나 살아있는 듯한 도형 하나가 마음을 건드린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일상 속으로, 문화는 아주 천천히 스며든다.


관심이 생기니 보이게 되고,

보이게 되니 느끼게 되고,

느끼게 되니 알게 되고,

알게 되니 즐기게 된다.


그렇다 보니 그림을 볼 때 호와 불호가 생기고, 다음 전시가 기다려지고, 기대가 된다.

비로소 예술작품을 즐김으로써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호주 여행 중, 우리 가족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미술관(Art Gallery of NSW)을 방문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었던 딸아이와 우리 가족은 종종 미술관을 찾곤 했는데, 이제 딸이 미술학도가 되면서 여행을 갈 때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지역의 미술관 유무를 가장 먼저 확인하고 꼭 들르는 것이 우리 가족 여행의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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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Gallery of NSW는 뉴사우스웨일스주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자, 호주 전체로 보아도 ‘빅토리아 주립 미술관’ 다음으로 손꼽히는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아름다운 외관으로도 유명한 이 미술관은 인위적이지 않은 베이지색 건물로, 고풍스러운 느낌과 현대적인 감각이 군더더기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억지로 멋을 낸 듯한 느낌이 없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는데, 글을 쓰며 다시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지붕 부분이 어딘가 한국의 전통 건축과 닮아 있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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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넓고, 높고, 밝았다. 시야가 탁 트여 있어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워낙 전시 공간이 넓다 보니 중간중간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나 의자도 잘 마련되어 있었지만, 관람객이 많다 보니 그 자리를 두고 조용한 눈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시장 내부의 벽면은 진한 자주색이었는데, 다소 옛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데 방해되지 않고 오히려 배경으로서 잘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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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갚었던 마이크로판화작품 손바닥만한 사이즈인데 꽤나 정교하다.

미술관은 총 4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호주 원주민인 어보리진의 예술작품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시대별 전시도 마련되어 있어 예술의 흐름을 따라가며 감상할 수 있었고, 특히 도자기나 설치미술 등 아시아권 전시물들도 눈길을 끌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흐, 피카소, 모네, 세잔 같은 작가들의 작품 앞에는 관람객들이 오랜 시간 머무르며 감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시실 중간중간에는 넓은 의자가 놓여 있어 앉아서 여유롭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감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공간이라는 점이 참 좋았다. 또한, 국내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유명 작가들의 멋진 작품들도 다수 전시되어 있어 새롭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신관에서는 종종 한국 작가들의 개인전도 열린다고 한다. 관심 있게 찾아본다면 멀리 타국에서 한국 작가의 전시를 만나는 뜻밖의 기쁨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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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온 가족 떠나온 해외여행이었고, 더욱이 호주는 내 생애 처음 방문한 나라였다.

‘언제 또 와보겠나’ 싶은 마음에 욕심을 내어 미술관의 모든 작품을 다 감상하고 싶지만, 시간과 체력의 한계는 늘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전시관 안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던 중, 자연스레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끈 나시에 짧은 반바지, 쪼리를 신고 진지하게 그림을 바라보며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한 여학생에게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자유롭고 편안한 차림새였지만, 그녀의 눈빛과 태도는 작품에 대한 집중과 감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야를 넓혀 전시장을 둘러보니, 관람객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술관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엄숙, 정숙, 고요, 경건하기만 한 감상의 풍조가 아닌 경직되지 않은 그들의 감상 모습이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마치 세수를 하고, 밥을먹고, 학교를가고, 도서관을 가는 일상의 한 조각같은 느낌으로 삶과 동떨어져있지 않다. 어디에도 크게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미술관은 ‘조심해야 하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는 듯하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경건할 수 있지만, 그것이 불편함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단순히 시간, 돈, 교육, 사회 인프라등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갖춰져 있다 해도 여전히 미술관, 전시회 같은 공간이 자유롭게 즐기기에는 어렵다.

예술을 향유하는 모습이나 양상이 다양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질감이 없이 예술을 향유하고 예술이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삶이 예술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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