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지 못한 베슬
새로운 나라나 도시를 여행할 때면 나는 첫날 반드시 현지 여행사를 통한 원데이투어를 신청한다. 과거에는 인터넷에 의존해 며칠씩 여행 루트를 짜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 과정은 늘 행복한 고민만은 아니었다. 날씨, 동선, 맛집, 시간, 교통, 예산 등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눈이 빠질 듯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머리가 터질 듯 복잡해진 적도 많았다.
물론 계획을 세우며 여행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비하면, 시간 대비 효율성은 확연히 떨어졌다. 슈퍼파워 대문자 J 성향인 나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늘 플랜 B, 플랜 C까지 준비해야만 안심이 됐기에,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한바탕 기진맥진이 되곤 했다.
그에 비해, 원데이투어는 여행의 시작을 훨씬 가볍게 만들어 준다. 여행지의 핵심 명소를 짧은 시간에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고, 현지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단순한 ‘관람’이 ‘이해’로 확장된다. 무엇보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없으니 비교적 편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이어질 자유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조언도 가이드에게 물어볼 수 있어 훨씬 유익하다. 대부분의 가이드들은 친절하고 경험이 많아 소소한 팁부터 예상치 못한 문제 상황까지 기꺼이 도와주려 한다. 나는 여행이 끝난 뒤에는 감사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베스트 친절 가이드 후기’를 성실하게 남김으로써 그 은혜에 나름의 성의로 보답을 한다.
하루 종일 가이드를 따라 준비된 차량으로 이동한 뒤, 숙소로 돌아와 동네를 걸어 다니다 보면 대충 동서남북이 머리에 그려진다. 낯설던 풍경이 조금은 익숙해지고 긴장도 풀려, 다음날부터의 자유여행이 훨씬 수월해진다.
2025년 5월, 뉴욕의 날씨는 한국의 늦봄과 비슷했다. 한낮엔 더웠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해 여행하기 딱 좋은 기온이었다. 뉴욕 도착 첫날 오후에는 뮤지컬 위키드를 관람했고, 본격적인 투어는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가이드의 모닝콜을 받고 간단히 요기를 한 뒤 서둘러 벤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생경한 냄새의 정체, 대마초였다. 낯설고 불편한 냄새에 당황할 틈도 없이 가이드는 재빨리 창문을 닫아주었다. 친절하고 세심한 가이드아저씨!!!
도심을 지나며 말이 도로 위를 지나는 풍경도 목격했다. 뉴욕은 관광도시답게 마차나 인력거 관광도 허용되고 있다고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뉴욕의 도심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도 했고 또 수많은 인종과 다양성 그 모든게 공존하는 그곳이 뉴욕이란 생각도 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명소는 ‘베슬(The Vessel)’이었다.
아름다운 조형미와 독특한 구조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위험한 장소이기도 했다. 베슬은 약 9년 전 허드슨 야드 재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구조물로, 공공 미술 계의 저명한 영국의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이 설계했다. 벌집을 닮은 입체적 구조는 16층 높이에 착륙지점만 80개, 계단 수는 무려 2,500개에 이른다. 중간중간이 훤히 뚫려있어 전망대 역할을 하며 도시 경관과도 잘 어우러진다.
베슬 꼭대기에서 허드슨강을 따라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강 너머로 조용한 도시 뉴저지가 펼쳐진다. 높은 건물 하나 없는 베드타운으로 90% 이상이 단독주택으로 되어 있다. 뉴저지에는 약 12만 명의 한인이 거주하며, 한인타운도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뉴욕과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능적으로 완전히 다른 도시다. 많은 사람들이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출퇴근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베슬은 구조적으로도 아름답지만, 멋진 구조물에 강이 흐르는 경관을 배경으로 안타깝게도 어두운 이면을 가진 장소이기도 하다. 2021년 이후 이곳에서는 총 5명의 투신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마지막 사건은 2023년, 학교에서 왕따로 고통받던 열네 살 소년이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뉴욕시는 베슬 전망대를 전면 폐쇄했고, 2년간의 안전장치 보완 끝에 최근에서야 다시 문을 열었다. 이제는 미리 티켓팅을 해야만 입장할 수 있으며,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없이 오로지 2500개의 계단으로만 올라가야 한다. 이건 정말 잘한 결정같다.
한계단 한계단 꾹꾹 밟아 오르다보면 삶에대해 한번더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이 구조물은 나에게 이번 미국 여행에서 처음 알게 된 특별한 장소였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도시와 잘 어우러진 세련된 구조물이란 생각이 들었고, 꼭 멋진 트로피 같기도 했다.
허드슨 야드의 개발자 Related Companies의 CEO 스티븐 로스는 이 특이한 모양의 이 구조물을
"12개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대적인 해석이 또 어떻게 보면 거꾸로 뒤집어 놓은 트리같이 보이기도 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꼭대기 까지는 아니더라고 계단을 조금 걸어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듣고 나니, 이상하게도 걸음을 옮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게 베슬은 내 생에 처음으로 아래에서 고개를 쳐들고 한참을 올려다본 전망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