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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고귀한 자혜의 온기

by 지언 방혜린

좋은 사람 옆에선 나도 좋은 사람이 된다.

함께 하면 늘 기분이 좋아지고, 닮아지고 싶어진다.


편안한 표정과 부드러운 말투,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과 시선,

꾸밈이 없고 포장하지 않는 본심,

손해를 좀 보더라도 양보할 줄 아는 여유,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태도까지

그 모든 것이 순수하다.

가끔은 ‘나는 왜 저만큼 닿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 한없이 작아지기도 한다.

미운 마음이 고개를 들고 질투가 피어오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좋은 사람 옆에 오래 있고 싶다.

그와 시간을 보낸 후 돌아오는 길은 따뜻한 고급 차(tea)를 마신 듯 잔향이 오래 남는다.

쉽게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머문다. 그에게 영향을 받아 나도 좋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착각이라도 좋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를 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늘 신중하다.

그래서 낯선 곳에선 항상 경직된다.

곁을 내어준 좋은 사람 옆에서 온기는 나눠지고,

결이 비슷한 좋은 사람 옆에선 자연스러운 진심이 흐른다.

격이 있는 좋은 사람 옆에선 내 품격도 높아진다. 고급스러워진다.

결국, 좋은 사람 옆은 언제나 안전하다.

어느새 경직된 표정과 몸, 마음까지도 새봄에 눈 녹듯 녹아내린다.

사람과의 관계가 꼭 시간의 누적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나이가 들어가며 더 선명히 느낀다.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지만, 만난 횟수로 따지면 손에 꼽을 만큼인 친구가 있다.

같은 연주 동아리에서 만 난 그 친구는 막 친해지기 시작할 무렵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가족이 해외로 떠났다가, 최근에야 다시 돌아왔다.


작년, 내가 지금의 합주팀에 들어가 첫 정기 연주회를 한다고 소식을 전했을 때가 기억난다.

한국에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짐도 다 정리하지 못한 채,

추운 겨울 택시를 타고 먼 길을 한달음에 와준 것이다.

연주 도중 서프라이즈로 나타난 친구를 보고 너무 놀라 연주를 망쳤다는 변명을 늘어놔 본다.

나는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지금 활동하는 합주팀에 합류할 것을 권했다.

지금은 매주 함께 연주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람이 잠깐 머물 때는 진짜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못난 모습을 숨길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인 척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진심인지, 계산된 행동인지 느껴진다.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면 결국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진짜 좋은 사람의 선한 인격과 마음의 결은 곁에 머물게 만든다.

물론 ‘좋은 사람’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많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다.

좋은 사람보다는 나와 맞는 사람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나에겐 불편할 수도 있고,

나에겐 별로인 사람이 다른 이에게는 소중한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존재만으로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는 사람이다.

진정성 있고 한결같은 사람은 어디서나 빛이 난다.

그런 친구 곁에서 많이 배우며, 나도 행복해진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그 온기를 다른 곳에서도 나누게 된다.

나쁜 사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좋은 사람들만 있는 곳을 골라서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도 사람 사이에서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줄이고 싶다.

요즘은 ‘나와 맞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센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최근 독서 모임 심화반에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읽고 있다.

오늘같이 비 오는 날, 베고 자기 좋은 두께의 벽돌 같은 책이다.

혼자라면 결코 끝까지 읽지 못했을 책을, 모임 멤버들과 함께 읽으며

팩트에 기반한 인간의 감정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놀라운 것은, 오래전에 쓰인 책임에도 인간의 감정을 세밀하게 분석해 놓았다는 점이다.

시대가 달라도 사람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번 새삼스러운 감탄을 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행위의 공로와 선한 응보에 관한 우리의 감각, 그 행위에 대한 보답의 적정성과 적합성에 관한 우리의 감각, 그리고 그 행위를 수행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되돌려주는 일의 적정성과 적합성에 관한 우리의 감각 등 우리의 모든 감각은 감사와 사랑의 동감적 감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그러한 고귀한 자혜의 정신으로 행동한 사람을 향해 열광하게 된다.”


즉, '선을 베풀고 착한 마음으로 행동한 사람에게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하고 싶어지는 마음은 그의 행동에 깊이 공감하며 생겨난 감사와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그의 선한 행동에 충분히 공감한 마음은 그를 향한 감동과 존경으로 이어진다.'라고 이해했다.

<도덕 감정론>은 ‘철학자의 철학책’이라 불릴 만큼 어렵다.

그렇지만 읽을수록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조금씩 읽으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이 글을 읽으며 그 친구가 생각났다.

언제나 세심하게 나를 배려해 주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넉넉한 마음을 나누는 친구.

어려운 일 앞에서도 먼저 나서서 솔선수범하는 그의 모습이 글자 속 문장들과 어우러져 하나 되어 보였다.

지난 주말에 있던 연주회에서도 비 오는 와중에 누구보다 먼저 무거운 짐을 나르고, 묵묵히 자리를 정리하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애덤 스미스가 말한 ‘고귀한 자혜의 정신’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따뜻한 마음의 결이 느껴졌고, 그 선한 결이 주변 사람들에게 잔잔히 번져갔다.

좋은 책을 읽으며 좋은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 곁에 내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내 삶을 조금 더 고요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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