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게 한 그림책 수업 이야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의 끝자락, 8월.
나는 ‘길 위의 인문학 그림책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림책이라면 아이들 어릴 적 읽어 주던 기억이 전부였고, 그림은 언제 마지막으로 그려봤는지조차 가물가물한 나로서는 꽤나 무모한 도전이었다.
신청할 당시에는 몰랐다.
이게 무모한 건지, 무지한 건지, 아니면 애초에 무리한 도전이었는지.
아마도 몰랐기에 무작정 신청했을 것이다.
문득 내가 한때 푹 빠져 보았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속 대사가 떠올랐다.
인도 속담이라며 이런 말이 나온다.
“잘못 탄 기차가 때론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그림책과 동화책의 차이도 모를 만큼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림을 좋아하던 나는 오래전부터 그림책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보니 그 마음이 결국 나를 이 자리로 데려다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림책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더미북을 만들어 점과 여백만으로 이야기를 구성해야 했는데, 첫 수업부터 뭔가 크게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당장 도망가. 분명 힘들 거야’
내 하찮은 이성은 어쭙잖은 계산을 앞세워 끊임없이 속삭였고, 그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의 소리는 달랐다.
내 생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 그림책 만들기에 꼭 마침표를 찍어보고 싶었다.
잘하든 못하든,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점점 더 단단해졌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 ‘잘못 탄 기차’ 위에 올라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기차가 어디로 향하든 한 번쯤은 흔들리며 끝까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림책 만들기 프로젝트는 출판사 이야기꽃의 대표님이자 김장성 그림책 작가님이 수업을 맡으셨다.
그림책 ‘이야기꽃’ 출판사의 김장성 대표님은 그림책을 쓰고, 만들고, 펴내고, 연구하는 일을 꾸준히 해 오신 분이다. 대표작으로는 『민들레는 민들레』, 『씨름』, 『겨울, 나무』, 『수박이 먹고 싶으면』 등이 있다. 특히 『수박이 먹고 싶으면』을 쓰고 그리기 위해 1년 동안 직접 수박 농사를 지었고, 30년 수박 농사를 지은 분에게 그림 검증까지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나 그림책에 진심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김장성 대표님이 이끄는 그림책 수업은 매번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말들 속에 꼭 하나씩 감동 포인트가 숨어 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두 번째 수업에 참석하지 못해 숙제로 혼자 세 권의 더미북을 만들어 갔던 날, 더미북을 발표하며 수줍게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자 대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들을 엄청 사랑하시네요. 이거, 꼭 그림책으로 만들게 도와드릴게요.”
그 한마디는 수업 시간보다 집에 돌아와 곱씹을수록 더 따뜻해졌다. 말들은 천천히 데워지듯 오래 마음에 남았고, 그래서 다음 수업을 매번 기다리게 되었다.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에 앞서 자화상을 그려보는 시간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한 번쯤 나를 그려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너머에 조각처럼 남아 있을 뿐 색도 모양도 흐릿해진 기억이었다. 그때 김장성 대표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 가 없습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정성껏 그리세요. 정성을 다해 보지도 않고 못 하겠다는 건 자만입니다.”
나는 나를 그리기 위해 나를 정성껏 관찰했다. 그 경험은 생각보다 묘했다. 그렇게 바라보니, 내가 조금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자화상은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제3의 인물이었지만, 대표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따님을 그리셨나요? 예쁜 소녀를 그리셨네요.”
수업이 끝자락에 다다르며 28장의 원화를 완성하는 작업은, 평생 그림을 거의 그려보지 않은 나에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 3일은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렇게 완성한 나의 첫 그림책,
『엄마의 언어』 부제: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말
원화를 끝낸 밤, 아들에게 “엄마, 완성했다”라고 자랑하자 아들은 짧게 말했다.
“엄마, 좀 멋지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수없이 했던 것처럼 엄지 척을 해주었다.
“고맙다, 이 녀석아!”
그림책을 끝낸 밤, 나는 오랜만에 짧지만 깊은 단 잠을 잘 수 있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얼마 후, 김포의 한 카페에서 우리는 다시 모였다. 점에서 시작했던 그림들이 한 권의 그림책이 되어 내 두 손에 전달되었다. 쓰지만 몸에 좋은 사탕을 하나 먹은 것처럼, 기분 좋고 잔잔한 여운이 남았다. 지나고 보니 모두 그리운 순간들이었고, 멋진 만남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스쳐 가고, 흘러가고, 남겨지고, 이어지는 인연들 속에서 밝게 웃으며 안녕을 나누었다.
마지막 시간, 김장성 대표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돌아보면 기준은 단순했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고, 안 하고의 문제였다.
했다.
끝냈다.
마침표를 찍었다.
이 좋은 경험과 이 느낌을, 오래도록 기억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