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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 Nov 22. 2024

시작은 그림 그리는 딸과 글을 쓰는 아들이었다.

'하늘에 구름이 보이다가 눈이 부신다. 잠깐 눈을 찡긋 감았다 뜨니 나뭇잎이 보이고 나뭇잎사이로 조각하늘이 보인다. 온몸에 힘을 빼고 누우니 구름 위에 누운 건지 물 위에 누운 건지 몸이 둥둥 떠서 흘러가는 데로 몸을 맡긴다.'

고등학생이 된 딸이 창의미술 수업시간 선생님의 묘사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며 너무 잘 았겠단다. 우리 딸은 배영하며 바라보는 하늘 모습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늦봄 가족여행으로 갔던 일본 유후인의 노천탕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천연계곡온천에 몸을 담그고 누워 배영을 하며 본 하늘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는... 나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날 정도로 강렬하게 좋았다. 물의 온도, 느낌 늦봄이지만 봄인지라 얼굴은 시원하고 하늘은 맑았는데 고개를 젖혀 본 하늘은 온통 나무로 뒤덮여있어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자세히 보니 모두 초록 단풍나무였다. 나는 꼭 가을에 다시 오리라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었다. 시원한 날씨에 뜨끈한 노천에 누어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며 즐기는 가을은 더 좋을 것이 분명했다.


 엄마 나는 이 느낌 알거든 해봤거든. 느껴봤거든. 내가 커서 또 미술을 하며 보니까 가끔씩은 귀찮기도 했던 그 모든 체험들이 다 도움이 되더라고. 맞아 그 모든 것들이 다 도움이 되었어.


 사실 헷갈리던 순간이 왜 없었으랴? 딸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시험을 치를 때마다 대학입시는 기승전 내신등급 점수인데 좀 더 빨리 선택하고 집중할 것을. 어차피 우리나라 제도권에서 입시를 치를 거면 유리하게 영어를 속도감 있게 빼서 중2 때 수능영어 끝내고, 수학을 몇 바퀴 돌렸으면 아이도 나도 몸과 마음이 덜 힘들었을까? 하는 마음의 소리가 수십 수백 수천번 들려와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런데 그 많은 체험이 도움이 되었단 아이의 짧은 고백에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의 수고와 나의 선택이 온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증명이 된 것 같아 잠시나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딸아이가 두 돌이 지나 3살쯤이었던 것 같다. 동네서점에서 색칠공부책을 구입했다. 딸아이는 하루종일 그 책에 낙서를 하고 글도 없는 그책을 거꾸로 들고 마치 책을 읽듯 중얼중얼 거리며 하루종일 놀았다. 아직 연필을 잡을 정도의 소근육이 발달되지도 않은지라 온 주먹으로 색연필을 꼭 쥐고 끄적이기 시작했다. 하루는 딸과 놀이터에 다녀오는 길에 산책 나온 빨간색 랄프로렌 폴로 스웨터를 입은 검은색 토이푸들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참을 지켜보다 온 적이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에 오는 길에 "엄마 나 오늘 집에 가서 저 강아지 그릴 거야" "응 그래~" 크게 의미 없이 대화를 하며 집에 와서는 아이를 씻기고 폭풍저녁준비를 했다. 아이는 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주로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무지 노트를 무릎에 바치고 조용히 집중하며 그림을 그렸다. 밥을 먹이고 책도 조금보고 치카를 하고 빨리 재워야 나는 육아해방이니 일사천리로 아이를 재우고 나왔다. 한숨을 돌리며 거실소파 위에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을 봤는데 깜짝 놀랐다. 아까 본 그 토이푸들을 부슬부슬 고불고불 윤기 나는 털과 빨간 스웨터의 특징을 고스란히 살려 그려놓은 것이다. 이 시기 엄마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우리 아이 미술영재인가? 까지는 아니었지만 뭔가 내가 놓치면 안 되지 싶어 며칠 후 동네 초등학교 근처에 미술학원에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들을 가지고 상담을 받으러 갔다. 선생님은 아이가 이제 4살이라고 하니 도와줄 게 없단다. 그냥 지금처럼 마음껏 그리게 하라고... 그때부터 우리 딸은 그림을 그리겠구나 생각을 했다. 3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던 딸은 지금 미술을 한다. 그것도 순수미술 동양화전공, 직업과 연관시키려면 디자인이 인기이고, 또 교육학이라도 들어 교직이수라도 하는 다리 하나쯤 걸치면 좋으련만 본인은 가르치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단다. 우리 딸은 무엇을 할까? 이제 또 그게 궁금하다.


  딸은 신생아 때 꽤나 예민한 아기였다. 유모차도 카시트도 타지 않고 잠도 내가 옆에 누워 같이 자는 게 아니면 깊게 길게 자지 않았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바람이 있다면 제발 유모차 잘 앉아 있는 아이가 나와 햇살 좋은 날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며 유모차 산책을 여유롭게 하고 벤치에 앉아 책을 좀 읽다가 아이가 깨면 슬슬 밀고 집에 오는 평범하지만 큰아이 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소소한 일상이 허락되길 상상했었다. 이 상상은 둘째 아들이 나오자마자 대차게 깨졌다. 태어나는 순간까지 선명하다. 얼마나 입을 크게 벌리고 울던지 입이 얼굴에 반이었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체감상 10분 이상 길게 자는 법이 없었다. 등에 센서라도 달린 듯 눕히기만 하면 울고 배고파도 울고 뭐 때문인지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정말 초특급 울트라 짱예민아기가 탄생한 것이다. 좌절의 연속이었고 너무 힘들어 남편과도 서로 육아를 떠넘기며 많이 싸웠던 것 같다. 아들은 호기심이 왕성했고 행동이 앞서는 행동파라 한시도 눈을 띨 수가 없었다. 한 번은 가족모임으로 뷔페식당을 갔다. 아들이 음식의 온도를 유지하려 켜놓은 화로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순간 직감적으로 뭔가 위험을 감지해서 달려갔지만 이미 아이는 손을 불꽃에 집어넣고 있었다. 다행히 빨리 아채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수포가 올라와 응급처치를 하며 물었다. "아들아 거기에 왜 손을 어 넣었어?" 아들은 불은 뜨겁고 빨간색인데 화로의 불은 파란색이라 뜨거운지 차가운지 확인해 보고 싶었단다. 하아~그 이후 아들은 여러 가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수많은 도전으로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맞이했고 나는 그때마다 간담이 서늘하다 못해 수명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들은 보통의 아이들이 보는 뽀로로, 로봇카폴리, 또봇, 터닝메카드를 가볍게 패스하고 디즈니영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3살 무렵 오래된 디즈니영화에 나오는 시그널음악 미키마우스가 배의 키를 조정하며 휘파람을 부는 장면만 나오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미키를 따라 엉덩이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아이는 놀이터에 가도 벤치에 앉아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도 영화를 보고 취향도 올드한 옛 디즈니영화를 좋아했다. 대여섯 살 무렵부터 아이는 극장에서 혼자영화를 즐겼던 것 같다. 지금도 시간만 나면 극장에서 주로 혼영을 즐긴다. 친구들과 같이 영화를 보면 꼭 혼자 다시 보고 봤던 영화 또 보고 극장이 놀이터인 아들이다. 아들도 이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래 물어보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영화감독이 될 거라고 했던 것 같다. 아주 잠깐 요리하는 셰프의 꿈을 꾸기도 했지만 정확히 초등 저학년 때 2년 동안 총 4학기의 방과 후요리학교의 수업을 받아보고는 요리는 어렵다며 본인과 맞지 않다고 깨끗이 포기선언을 하였다. 나는 혹여 우리 아들이 제2제의 백종원이나 요즘 유명한 미슐랭 3랭 스타 안성재셰프가 될까 싶어 내심 기대하며 각종 요리수업, 원데이클래스를 열심히 데리고 다녔다. 영양사 실무경력을 살려 집에서도 엄마와 함께하는 요리시간도 갖으며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수많은 직업 중 셰프는 과감히 쳐지고 말았다. 아들이 셰프의 꿈을 접고 영화감독만의 꿈을 키워간다고 했던 2018년은 아들 초등 2학년이었다.


미국에서 영화 라라랜드가 대박을 쳐서 그 해 아카데미시상식의 많은 분야의 상을 휩쓸었다. 우리 가족은 아들을 위해 LA에 라라랜드를 테마로 한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에서 내내 아들은 라라랜드를 보았고 영화음악을 들었다. 영화 속 여주인공 엠마스톤이 달빛을 닮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남자주인공 라이언고슬링과 춤을 추던 그리피스천문대에 가서 춤도 추고, 산타모니카 해변도 걷고, 영화 속 거리 곳곳을 따라 여행을 했다. LA 할리우드 사인도 가보고, 스타의 거리에 찍힌 엠마스톤의 핸드프린팅에 손도장도 찍어보았다. 아카데미시상식이 열리는 돌비시어터에 가서 오스카상의 동상에 매달려 사직도 찍고 아들은 이곳이 천국이라고 했다. 유니버설스튜디오에서 실제 재난영화촬영의 체험도 했다. 전체가 영화를 테마로 한 놀이동산은 우리 아들의 꿈의 동산이었다. 지금도 종종 미국 가는 비행기티켓만 사주란다. 참 아직도 현실감각이 없는 건지 원......  

어린시절 아들의 습작노트

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저런 테마로 미국여행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 또는 가족 친지들이 남자아이 이과를 가야지 문과 가서 뭐 먹고 사냐는 둥 걱정과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지만 영화감독이 꿈인 아이에게 머릿속이 이야깃거리 아이디어로 계속 돌고 있는 듯 한 아들에게 기술을 배우라고도 수학과 물리를 잘해서 모든 엄마들의 꿈, 인서울 진학을 성공적으로 하고 삼성 같은 굴지의 대기업에 가라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들이 어릴 때의 경험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 느꼈던 감정은 깊이 남는다고 강조한다. 아이들이 아주 어린 시절 겪은 행복한 순간이나 즐거운 체험은 그들의 감정과 뇌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우려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출처 IMBC 오은영박사님 기사)


나는 우리 아이들 위해서 아이들 때문에 아이들 덕분에 미친 듯이 체험을 하러 다녔다. 큰아이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온 LA한인타운 사진을 보며 혼잣말로 '엇 나 여기 가봤는데' 하니까 친구들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단다. 나는 아이에게 '어디 가봤니? 무엇해봤니? 하면 대충 기억 안나도 다 한 거라 생각하면 돼!!'라고 말해 주었다. 그만큼 아이들 어렸을 때 경험과 체험 진심이었다. 아이들이 체험하고 경험하는 그 순간 나는 너무 행복했다. 아이들 기억 속 항아리에 언제든 뽑아 쓸 수 있는 아이템 가득 담아놓은 느낌이고, 이런저런 체험을 할수록 한 달 두 달 적금 부어 만기가 다가올 때 이자까지 붙어 목돈으로 탈것만 같아 설레었다. 이제부터 그 체험 스토리를 기억을 더듬어 써보려 한다. 생각해 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보물 같은 시간 내 생에 최고의 육아 시간이었다. 요즘도 가끔 남편과 '우리 그때 정말 재밌었는데...'하고 얘기하곤 한다. 울 아이들 꼬꼬마 시절 추억 여행이 될 것 같아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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