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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 Dec 06. 2024

독서육아 #01

엄마도 나에게 독서를 위대한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었던 듯해

로알드 달은 그의 작품을 통해 독서가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중요한 도구임을 일깨워주었다.

"독서는 아이들에게 마법 같은 세상을 열어준다. 그 마법은 평생 동안 그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출처: 로알드 달,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


우리 엄마는 책을 좋아한다. 지금도 배움에 열정이 대단하다. 우리 외할아버지가 8남매 중에 사내 아이들만 교육을 시키지 않고 잘하는 아이들 순서로 팍팍 밀어주고 투자를 했다면 우리 엄마는 아마 어떤 분야든지 간에 박사쯤은 되어있지 않을까 싶다. 가끔은 '내가 엄마의 엄마였다면 교육을 잘 시켜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쉽기도 하다. 어렸을 때 엄마는 집 앞 상가에서 수입상품 선물가게를 운영하셨는데 당시 무료하고 무한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상인들에게 매주 도서트럭이 와서 얼마의 대여료를 지불하면 책을 대여해주곤 했다. 엄마는 딱 베고 자기 좋은 두께의 책들에서부터 꽤 권수가 많은 시리즈물 역사 정치소설뿐 아니라 말랑말랑한 감성 시집까지 마치 어린 시절 채워지지 않은 지적 욕망을 차곡차곡 채우듯 엄청나게 몰입해서 책을 읽어내었다. 어느 날은 학교 다녀온 나에게 엄마의 감성 한 스푼을 담아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 짧은 글이나 시집에서 인상 깊은 시 한 구절을 쪽지나 휴지에 써서 전해주기도 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눈을 맞춰가며 따뜻한 말로 차분히 설명해 주는 엄마는 아니었지만 어설프고 수줍게 쓰인 글을 쪽지로 건네던 젊은 시절 엄마가 내 나이 50이 다 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생생하다.  


여름방학을 앞둔 초여름 어느 날 하교하고 집에 왔는데 거실방 책장에 책이 빼곡하다. 못 보던 빧빧한 책이 정갈하게 순서대로 꽂혀있는데 우리 집이 서재 딸린 부잣집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한꺼번에 3세트는 그 당시 우리 형편에 꽤나 부담되었을 텐데 엄마가 큰 맘을 먹고 고르고 골라 우리 삼 형제에게 백과사전, 과학동화, 명작동화전집 3세트를 들여준 것이다. 지금처럼 동마다 도서관이나 서점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날 밤은 밤새도록 책속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그림은 예쁠까? 상상하느라 설레어서 잠을 설쳤던 것 같다. 다음날부터 학교가 끝나면 집에 빨리 가서 무슨 책부터 읽을까 고민을 하였다. 가장 먼저 술술 재미있게 읽혔던 건 과학동화였다. 그 해 여름방학은 정말 태어나 처음으로 책에 푹 빠져 보낸 듯하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방학이면 학교에서 방학 탐구생활이라는 학습지를 과제로 내어주었다. 매일 날짜별로 하는 탐구생활, 일기, 그리기 1점, 만들기 1점, 독후감이 세트로 매 방학의 숙제였다. 방학 내 놀다가 개학 전날 밀린 일기를 밤새쓰고 날짜 별 날씨를 몰라 물으러 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탐구생활에는 국어, 수학, 과학, 사회과목의 방학 중 학습을 이어가기 위해 준비된 예,복습의 교과내용도 있었고, 약간은 재밌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과제로 일상의 상식내용과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할 수 있는 과학실험 같은 흥미로운 탐구활동도 있었다. 사실 엄마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엄마가 있는 친구들은 도움을 받아 탐구생활 속 거의 모든 실험과 활동을 방학 동안 직접 해보고 숙제를 빼곡히 적어왔는데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바빠서 실험이나 견학 같은 것에 동행해 줄 수 없으니 엄마가 책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이다.

또 3형제가 책을 모두 잘 활용만 한다면 엄마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엄마가 사준 백과사전, 과학동화, 명작동화전집을 읽을 때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특히나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과학동화는 과학적 설명과 원리를 우리 실생활에 적용시켜 자세한 실사 사진이나 이미지 애니메이션과 함께 세세히 설명되어 있었는데 책을 읽고 잡학박사가 된 기분이었다. 기억나는 책 내용 중에 하나 우리 몸에 눈 다래끼와 사마귀는 왜 나는지? 방지할 예방법과 치료법에 대한 설명, 근거 없는 잘못된 민간요법을 알려주어 지혜롭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금까지도 잘 활용하고 있다. 학기 중에 숙제를 할 때는 주로 동화전과의 도움을 받곤 했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좀 더 보충해서 조사할 내용이 있으면 백과사전이 그 몫을 톡톡히 했다. 인터넷 검색엔진이 없던 시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정말 백과사전에는 없는 게 없었다. 오죽하면 이름이 백과사전일까? 지금 생각해 보니 이름도 딱 맞게 잘 지은 듯하다. 잘난척하며 친구들에게 과학동화나 백과사전에서 얻은 지식을 설명 해주기도 했다. 과제가 풍성해지니 수업 중에 발표도 많이 하고 싶어 져서 딱 그 시기 3, 4, 5학년때 성적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다. 여름방학에 사준 책은 방학을 지나고 2학기 내내 읽었다. 한참 명작동화를 읽던 시절 3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반 학예회에서 장기자랑을 한다고 하니 갑자기 창작부심이 뿜뿜 솓아 올랐다. 나는 길지 않은 연극 시나리오를 1편 썼다. 스쿠루지이야기와 성냥팔이 소녀를 조금씩 섞은 내용으로 약간의 감동과 교훈도 넣은듯하다. 뮤지컬 형식으로 율동과 노래도 있어서 당시 우리 반에서 제일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도 합류시켰고 우리 집에 딱 하나 있었던 최고 인기개그맨 영구의 캐카세트테이프를 중간중간 틀어서 효과음을 주어 극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연출을 하기도 했다. TMI이지만 카세트의 일시정지 버튼과 녹음버튼을 구분 못하여 두 개 다 소리가 안 나오니 계속 누르며 연습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음악은 지워지고 우리 연습하는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유일한 우리 집 캐롤테이프를 망가트려 엄마에게 혼구녕이 난 기억이다. 그렇게 우리 엄마가 없는 형편에 엄선하여 사준 3세트의 전집은 내 감성발달의 처음이었고, 내 자기주도 학습의 시작이었으며, 내 초등독서의 전부였다. 정말 잘 활용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고 하면 가끔씩 집안에 누가 그림 그리거나 글 쓰는 사람 있냐고 질문을 받곤 했다. 나의 대답은 전혀 없다였다. 그럼 아빠, 엄마 중 누구의 끼를 받은 건가요? 다시 물으면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곰곰이 옛날을 생각하며 글을 써보니 한 번도 어디 가서 말한 적은 없지만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시나리오쓰는 우리 아들의 창작에 대한 재능과 열정 끼 같은 건 내게서 온 건가 싶기도 하다. 또 더 올라가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내 가늘고 긴 창작에 대한 의지는 엄마가 키워준 것이었다.

사진출처:네이버 블로그 추억의 옛 만화방
사진출처:네이버 블로그, MBC표준FM 별이 빛나는 밤에 과거모습

하지만 책이 재밌었던 건 딱 거기까지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나는 순정만화와 라디오에 흠뻑 빠져버렸다. 하교하고 집에 오는 길에 만화방에 가서 새로 나온 만화를 세트로 빌려 밤새도록 읽었고, 중고등학생시절 내내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나의 문화이고, 철학이고, 문학이며 전부였다. 매 년 연말이 되면 손엽서를 써서 별밤달력을 받기도 하고, 사연을 보내 해외의 감미로운 팝 음악들을 신청하여 듣기도 했다. 내가 신청한 음악이 별밤지기 문세오빠의 소개로 나올 때면 온 우주가 나만을 위해 돌고 있는 느낌이 들정도로 행복했다. 그 시절 라디오에 빠진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독서가 계속 이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과 갈증은 지금도 아쉽다.  


아이들이 책을 읽으며 웃고 울고 꿈꿀 수 있다면,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꿈을 잃지 않을 것이다.
출처 : 안데르센 동화 서문

아직도 나는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마음껏 폭 빠져지지 않는다. 내 마음속 독서활동은 아침에 일어나 씻고, 매 끼니를 챙겨 먹고,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상이기를 원하는데, 생활의 분주함과 무질서가 찾아오면 독서는 제일 먼저 한편으로 제쳐둔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 넘게 단 한 권도 읽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신기한 것은 책이 영 놓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읽지는 않아도 서점에 들르면 읽고 싶은 책을 또 굳이 사서 꽂아두니 그렇게 읽어야 할 책이 책장에 아직 많다. 잊지 못한 첫사랑 같은 마음이랄까? 그건 아마도 엄마가 사준 그 3세트의 책에 빠져본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경험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새삼 엄마에게 감사하다. 지금처럼 독서교육 같은 구체적인 교육철학이나 교육관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우리 엄마도 우리 삼 형제에게 독서습관을 위대한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은 막연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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