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예민하기도 했지만 겁도 많았다. 집에 있는 1단짜리 실내 미끄럼틀도 제 키가 미끄럼틀보다 훨씬 커져서 올라가 앉아 다리를 쭉 뻗으면 찍 10CM쯤 내려와 발이 바닥에 닿을 때쯤에야 겨우 타기 시작했다. 미끄러짐의 스릴을 즐긴다기보단 발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미끄럼틀에 붙여 무릎을 폈다 구부렸다 하는 셀프수동시스템으로 즐긴 셈이다. 1단짜리 미끄럼틀이 더 이상 스릴 있는 미끄럼이 아닌 안락한 의자의 기능만 할 때쯤 동네 육아 온라인 카페에서 드림을 받아 웨이브가 있는 2단 미끄럼틀을 들여주었다. 사실 새로운 육아템이 들어오거나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아이보다는 내가 더 설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기대나 설렘과는 달리 방안이 미끄럼틀로 한가득인데 딸은 나름 스릴 있어 보이는 2단 웨이브 미끄럼틀을 만지기만 할 뿐 타볼 생각을 안 한다. 엄마가 도와준다 잡아준다고 아무리 구슬려도 꿈쩍을 안 하고 이제는 미끄럼틀인지 의자인지 모를 1단 미끄럼틀에서만 주야장천 앉아있다. 가끔씩 나를 도와주러 온 우리 친정엄마가 보다 못해 약간의 팁을 주었다.
"앉아서 내려오는 게 무서우면 엎드려서 내려와 바" 하고 방법을 손수 몸으로 알려주었다. 미끄럼에 앞으로 엎드리면 이미 반은 내려온 거니 좀 덜 무서워 보이긴 했다. 할머니의 시범을 찬찬히 보긴 했지만 역시나 시도는 하지 않았다. 기대와 다르게 씩씩하게 도전하고 즐기지 못하는 이런 딸이 답답하기도 했다. 딸과 난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방 한편에 이부자리를 펴고 종종 잠이 들었다. '부스럭부스럭 쉬익~착'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다. 잠결에 이상한 소리에 깨서 옆을 보니 딸아이가 2단 웨이브 미끄럼틀에서 엎드려 내려오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는 실루엣이 어렴풋 보이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아는 체 하면 또 안 탈까 봐 방해하지 않고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한참을 보았다. 밤새 저만큼 도전했고 저만큼 성취한 딸아이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참 이게 뭐라고... 그 후로도 몇 날 며칠을 딸아이는 2단 웨이브 미끄럼틀을 질릴 때까지 엎드려서 탔다.
주말이 되면 '남편과 아이와 어디를 가서 놀아야 재밌게 잘 보냈다고 소문이 날까?'가 그때쯤 나의 최대의 고민이었다. 그 당시 막 생기기 시작한 소셜커머스에서 뽀로로 테마파크 티켓을 핫딜로 선착순 판매하고 있었다. 고민 없이 티켓을 재빠르게 구매했고 주말 우리 셋은 난생처음 재밌는 곳을 발견했다. 마침 가는 날이 좀 이른 추위가 찾아온 초겨울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실내 테마파크 티켓을 구입한 나 자신을 칭찬해하며 성공적인 방구석 탈출을 자축하였다. 지금은 여기저기 흔한 테마파크이지만 그 당시 처음 가 본 상설 뽀로로 테마파크는 입장과 동시에 공연도 볼 수 있고, 춤도 추고, 노래도 따라 부르며 흥을 한껏 돋아주어 혼을 쏙 빼놓았다. 1단 미끄럼틀 겨우 졸업하고 2단 미끄럼틀 엎드려 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뽀로로와 함께 타는 꽤나 높은 에어 미끄럼틀을 스스로 줄을 설 줄도 알고, 한번 체험하고 재밌으면 다시 긴 줄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타기도 한다. 또 루피의 요리교실에서는 쿠키도 만들어 와서 간식으로 먹고, 에디의 미술교실에서는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실내 어린이 낚시터에서 장난감 물고기 낚시놀이도 할 수 있었다. 남편과 둘이 번갈아가며 아이를 보고 쉴 수도 있는 그곳은 우리들 모두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는 곳이었다. 놀다가 허기지면 한편에 마련된 간식코너에서 각자 취향 것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며 진정 이곳이 천국인가? 주말 내내 집에서 셋이 지지고 볶고 남편이랑 서로 아이랑 놀아주기를 미루며 눈치게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합리적인 곳. 하루 실컷 놀다 오면 밤에 아이는 골아떨어져 잠도 잘 잤다. 할인받아 저렴하게 티켓을 구매해서 온 만큼 발빠르게 줄을 서고 움직이면 보다 더 많은 놀이와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구보다 가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뽕을 뽑는걸 인생의 모토 삼아 살고 있는 우리 부부는 2인 1조로 줄을 서고 체인지하고 빠지는 시스템이 구축하여 부부의 자녀체험 분업화가 되고 있었다. 저녁에 집에 오면 오늘 체험의 아쉬운 점 잘한 점을 복기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준비된 체험을 빠짐없이 잘하고 온 날은 서로서로 본인의 덕이라며 으스대기도 하고, 동선이 꼬이거나 우왕좌왕 줄을 잘 못서서 체험을 얼마 못하고 온 날은 서로를 탓하며 또 다음을 파이팅 하며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혼을 쏙 빼놓은 복작복작한 저곳에서 검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멍한 모습으로 두리번거리던 아이도 또래 아이들이 하는 모습을 찬찬히 보더니 슬슬 도전이 많아진다.
우리나라의 월별 축제지도
이제 나는 정보와의 싸움이었다. 지역 카페를 매일 정독을 하여 가까운 곳에 있는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뿐 아니라 서울 경기도, 지방 할 것 없이 도청, 시청, 구청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전국방방 곡곡에 계절마다 준비된 각종 축제를 다니는 것도 즐거웠다. 어디를 가든지 어린이 프로그램이 잘 준비되어 있어 공짜체험이 한가득이다. 운이 좋으면 체험을 하고 식구수 데로 양손 가득 사은품이나 경품도 타오는 호사를 누린다. 잘 준비된 지역축제가 홍보가 덜 되어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으면 흥은 좀 덜 나도 체험과 경품을 독점할 수도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 벚꽃 장미 튤립 꽃 축제를 시작으로 국화, 수국, 동백꽃 축제까지 일 년 내내 꽃잔치이다. 계절별 음식축제는 전어, 꽃게, 대하, 쭈꾸미축제 지역별 음식은 강화인삼, 김포금쌀, 청송사과, 공주알밤, 청양고추, 파주장단콩 모든 지역에 대표하는 음식과 특산품들이 나 좀 보러 오라고 줄지어 있다. 우리나라는 축제의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철마다 고장마다 끊임없이 축제가 있다. 축제만 쫓아다녀도 과로사 할 지경이다. 우리 아이들 꼬꼬마 시절은 일일이 검색해서 정보를 수집했는데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에서 지역축제 일정이 일목요연하게 월별 일별 지역별 축제명까지 나와있다. 너무 친절한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만세!!!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이면 남편이 의례 내일은 어디 출동이냐며 물었다. 그럼 나는 스케줄을 좌악 읊어 주고 "준비는 되어 있겠지?" 하며 우스개 농담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에게 고맙다. 남편은 내가 준비한 스케줄에 한 번도 'NO'한 적이 없었다. 때로는 기사로 때로는 물주로 또 때로는 든든한 보호자로 항상 함께해 주었다. 남편과 육아 철학이 같다는 건 정말 중요하다. 물론 우리 같은 경우는 시작이 남편은 나의 육아철학에 살짝 올라탄 거지만 흔들리지 않은 단단한 육아관은 육아는 과학임을 증명해 준다는 나름의 개똥육아철학에 여전히 기꺼이 동참해주고 있는 남편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만, 한 곳을 바라보고 노를 저어 간다면 도중에 멋진 풍경도 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대어를 낚을 수도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아련하고 그립다. 남편과 나 아이들 기억 속에 각자 따로 차곡차곡 쌓인 같은 추억들이 지금도 가끔 이야기할 수 있어 행복함에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