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매체가 많지 않던 시절 최고 시청률 61.1% 달성했던 최수종, 김희애, 채시라, 한석규, 오연수 주연의 기록적인 드라마였다. 아마도 40대를 중심으로 알든지 모르든지 할 듯싶다. 드라마 속에서 오연수는 오랫동안 귀남이 최수종을 짝사랑하고 여자는 공부도 잘 안 시키던 시절 대학졸업까지 한 엘리트였다. 하얀 가운을 입고 급식을 책임지는 전문직 여성 당시 처음 들어보는 '영양사'라는 직업이었다. 영양사라는 직업을 처음 접하고 생소했지만 꽤나 멋지게 느껴졌다.
수능을 보고 식품영양학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과공부는 생각보다 적성에 맞지는 않았다. 중간에 편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대학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놀았기에 편입은 물 건너가고 대신 시기에 맞춰 운이 좋게도 조리사 자격증과 영양사 면허증을 단번에 취득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모 백화점 영양사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이제 막 졸업을 한 20대 사회 초년생이 중식기준 1300식 석식, 간식까지 하면 2500식 이상을 매일 준비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은 아니었다. 백화점 직영으로 운영하는 급식의 메인 영양사가 되기에는 경험도 없고 역시나 역부족이었다.매일이 전쟁 같았다. 당시 영양사라는 직업은 백화점 내에서 어디에 소속되기도 애매한 직군이라 주로 총무팀 내지는 경영지원팀 소속이었다. 내가 취업을 하던 90년대 말은 지금처럼 업무분장이 잘 되어진 시대가 아니었기에 영양사의 고유 업무인 메뉴플랜, 식품발주, 검수, 레시피점검, 배식 위생점검등 급식전반의 업무 외에 것들이 발을 꽁꽁 묶어 제시간에 퇴근을 할 수 없었고 마음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젊게는 40대 엄마뻘에서 60대 할머니뻘의 조리 종사원들의 인사관리도 해야 했는데 종종 있는 조리실 내에서의 살벌한 완력다툼의 서열정리도 해 줘야 했다. 자칫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는 듯 비치면 조리원들의 곤조는 영양사하나 바꿔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싸움의 원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20 평생 살아온 내 인생의 깊이로는 공감이 전혀 되지 않는 그분들의 살아온 인생 하소연까지 진심으로 들어주고 회식자리에서 삼겹살 쌈까지 싸 먹이며 그 마음들을 달래야 겨우 풀어지기도 했다. 소속이 경영지원이다 보니 가끔은 식권도 팔아야 하고, 구내식당 한켠에 마련된 매점의 물건도 팔아야 했다. 백화점 직원의 대부분이 여자이고 서비스 판매업이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고 주말이 지나면 여직원들의 유일한 낙인 월요일 중식 메뉴에 온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사실 1300명의 기호를 어느 누가 만족시킬 수 있으랴? 매월 사장실에는 직원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소통을 하려 만든 제도로 월기라는 것을 제출했는데 불평불만의 8할은 직원구내식당의 건의였다고 하니 정말 출근하는 게 지옥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영양사의 이직률은 높았고 나 역시 첫 직장이 평생직장은 되지 못하고 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기업체에서 영양사의 업무를 보았지만 결국 나는 두 번 다시 영양사 가운은 입지 않으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미련 없이 영양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4대 보험을 납입한 덕분에 고용보험공단의 재취업 과정으로 컴퓨터학원에서 1년 동안 웹디자이너과정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조리사협회산하 작은 업체에 웹디자이너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웹디자인을 하는 건 재밌기도 했지만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 수반되기 때문에 배너하나를 만들더라고 창작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미적감각도 있어야 했고, 센스도 있어야 했는데 1년 정도 배운 실력으로는 경험을 차근차근 쌓아가며 따라가기에는 너무 빨리 트렌드가 바뀌고 반영되는 작업이었다. 전문지식을 수반한 체계적인 교육 또는 타고난 재능 없이는 오래 하기엔 이 직업 또한 녹록치 않았다. 몇 개의 쇼핑몰 사이트와 개인 홈페이지들을 의뢰받아 디자인 작업하고 쇼핑몰에서 제품 편집도 해봤지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경력까지 단절되고 나니 30대 아줌마가 돌아갈 웹디자이너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은 능력만 된다면 투잡 쓰리잡까지 가지고 있고, 원한다면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업무를 보는 멀티가 가능한 시대지만 그때 당시는 평생직장 25년 근속을 표창하던 시절이었는데 한 가지 직업으로 장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착하지 못하고 또 헤매는 나 스스로에게 조금은 자괴감도 들었다.
'왜 나는 진득이 못 견뎌내는 거지?'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두 아이 모두 기관에 가게 되니 다시 취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 다니는 큰아이가 몇 해 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학교에서 근무를 해볼까 싶어 집 근처 초등학교에 일 자리를 알아보았고 다행히 적당한 자리가 있어 지원하여 교무실에서 교무행정 지원업무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 일을 배울 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사회초년생으로 정면으로 부딪히던 20대 그 시절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출산해서 키우다 나온 그 당시 내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다.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업무를 바라보는 탄력적인 시선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때 마음으로는 다시 그 시절 백화점 영양사로 취업을 한다면 이제 진짜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 이상 잘하진 못해도 월기의 100%가 구내식당 관련이라 해도 지나가는 나를 보고 여직원들이 서슬 퍼런 원망과 시비의 눈빛을 보내온다 해도 반달모양 눈웃음을 지으며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이 시간이 나를 변화시킨 걸까? 아니면 결혼해서 든든한 내편이 생겨서인가? 죽을 각오로 무통주사 한번 안 맞고 두 번의 출산을 해내어 여자에서 엄마로 신분상승이 된 것이 나로 하여금 무모하리만큼 용기를 샘솟게 하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수능을 봐서 서울대를 가라고 해도 애 둘이나 나서 키웠는데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학교에서의 업무는 주로 방과후학교 전반적인 업무를 맡아보았고 업무도 적성에 맞고 보람되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중간에 육아휴직을 하긴 했지만 10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세 지나간 듯하다. 남편이 이직을 하고 직장이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버티고 버티다 결국 우리는 남편의 회사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전학을 하게 되고, 모든 환경이 바뀌어 적응도 해야 하고,I 무엇보다 큰아이가 곧 사춘기를 겪을 나이라 남편은 내가 계속일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나는 전보내신을 내지 않고 퇴직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 엊그제 이사 온 것 같은데 벌써 7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아이들은 부쩍 자랐고 큰아이는 곧 수능시험을 보고, 작은아이는 예고입시에 도전했다. 많이 컸다. 올 초에 나는 불안 초초 예민 걱정의 모든 부정적 감정에서 나를 통째로 들어내려면 무조건 바빠져야 한다. 나에게 집중하자 싶어 많은 시작에 다시 도전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얻은 질병으로 아직 풀타임 직업을 가질 수 없어 내 체력을 고려한 이런 저런 파트타임 업무를 찾아보다가 100명 이상 어린이집에서 관리영양사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이럴 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하나? 아 맞다 나 영양사였지!, 오래전이지만 실무경력도 있고 조리사 작격증에 보육교사자격증까지 있는... 증있는 여자였지!!!'
다시는 영양사 가운을 입을 일이 없을 줄로 알았는데 지금 나는 100인 이상 어린이집 두 곳에서 조리사님 교육과 조리실 위생관리, 메뉴점검, 5,6,7세 어린이집 유아동 위생교육, 영양교육을 하고 있다. 그동안의 나의 N잡들의 경험이 엑기스로 녹아 버무려 저 보다 풍성해진 느낌이다. 내가 나눌 수 있는 무언가 있다면 가감 없이 다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아이들도 예쁘고 우리 아이들 언제 저럴 때가 있었나 싶게 새롭다.
인생은 참 모르는 듯싶다. 그렇게 지지고 볶고 다신 영양사를 안 하겠다 호언장담 했건만 다시 가운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앞으로의 내 모습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되어 있을지 기대도 된다. 그러기에 현재를 더욱 밀도 있게 잘 살아보자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