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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의 추억 #03

된장의 추억이 소환한 그리운 외할머니의 음식들

by 지언 방혜린

우리 엄마는 9남매의 여섯째이다. 그만큼 우리 외가댁에는 손자 손녀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 외할머니는 유독 나를 예뻐하였다.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할머니의 사랑이 차고 넘쳐 아직까지 내 안에 온기가 남아 따뜻하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아주 작은 체구에 항상 머리를 쪽을 지고 있었다. 부지런하고 지혜로웠다. 유머러스하고 음식솜씨는 단연 최고였다. 어릴 때 아빠가 해외로 근무를 하러 가시면 엄마 혼자 삼 남매를 키우기가 버거워 한 번씩 전북 익산에 있는 외가댁에 우리를 한 명씩 보내곤 했다. 시골에서 크게 농사를 짓던 외할머니는 나에게 딱히 신경을 쓴다기보단 그저 삼시세끼 맛있는 밥을 차려 주고 농사일에 항상 바빴다. 나는 그 동네 사는 큰 외삼촌 둘째 외삼촌네 사촌들과 산으로 들로 강으로 놀러 다녔다. 가끔씩 배가 고프면 부엌 부뚜막 커다란 솥단지에 할머니가 간식으로 만들어놓은 설탕 뿌린 누룽지를 먹고 또 해가 질 때까지 나가 놀았다.

외갓집 뒤뜰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고, 앞마당에는 큰 감나무가 있었다. 가끔씩 점심을 먹고 툇마루에서 할머니 다리를 베고 누우면 잠이 쏠쏠 오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외갓집 앞마당에 오래된 감나무가 가을이 깊어지면 감이 새빨갛게 익다 못해 그 무게를 감당 못하고 툭 떨어진다. 할머니는 재빨리 감을 주워 흙을 털고 꼭지를 떼어내고 속을 바른 뒤 두리번 거린다. 나를 찾는 것이다. 다른 손주들이 들을 까봐 굳이 큰소리로 나를 부르진 않는다. 내가 가만 보고 있다 눈치껏 재빨리 할머니 곁으로 가면 발라낸 감을 내입에 쏙 넣어준다. 잘 익은 감이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내 입속으로 쏙 흡입된다. 잠깐 황홀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왜냐하면 나만 주는 특별한 간식 둘만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감이 딱히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할머니의 서울에서 아이를 키우느라 고단한 여섯째 딸의 손녀를 위한 특별한 사랑법. 챙김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귀국하고 나를 데리러 온 가족이 외가댁으로 왔다. 오랜만에 온 사위를 위해 할머니가 기꺼이 토종닭을 잡았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또 나를 부른다. 배를 가른 닭에 쌍 알이 노랗게 있다.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닭의 뱃속에 쌍알은 메추리알처럼 작았고 껍질도 흰자도 없이 노른자만 두 개 덩그러니 있었다. 할머니는 또 얼른 노른자를 손으로 떠내어 금방 짜내어 풍미가 가득한 생들기름 소금장을 찍어 내 입에 쏘옥 넣어 주었다. 비위가 약해 평상시 같으면 그런 걸 먹을 거라곤 상상도 못하지만 할머니의 마법 같은 손맛은 보증수표와 다름없어 거절할 생각도 안 했다. 역시나 고소하고 맛나 그때 그 맛기억이 생생하다.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쌍알 날달걀이었다. 그날 먹었던 토종닭으로 만든 백숙과 닭볶음탕은 그 이후 어디서도 못 먹어볼 맛이었다. 바쁜 농사를 지으며 9남매를 키워낸 할머니의 요리솜씨는 특별할 게 없어도 뭐든 맛났다. 크게 오랜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아도 뚝딱뚝딱 요술처럼 대 식구의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려 내었다.


중학생이 되어 내가 시골에 갈 수 없으니 한 번씩 할머니가 우리 집에 다녀갔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밀린 대청소를 하였다. 딸 내 집에 와서 조금 쉴 법도 한데 저녁이 되면 욕조에 물을 한가득 받아 우리를 한 명씩 밀어 넣고 초록색 이태리 타올로 껍데기가 벗겨질 듯 때를 밀어주었다. 아마도 구석구석 깨끗이 씻어놔야 다음 올 때까지 유지될까 싶은 그런 마음이었나 보다. 우리를 다 씻기고 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음식 만들기를 한다. 각종 밑반찬이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건 흔하디 흔한 콩장과 깻잎 순 조림이었다. 할머니가 유리냄비에 불린 서리태콩을 넣고 콩장을 한가득 만들며 하신 말씀이 "이거 잔뜩 만들어 놓고 갈 테니깐 엄마한테 벤또반찬으로 싸달라고 해~"라고 하였다. 할머니 콩장은 달콤 짭쪼롬하고 딱딱하지도 않고 고소하고 촉촉한 게 진짜 맛이 일품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엄마한테 할머니 콩장이 먹고 싶다고 하지만 역시나 엄마의 콩장은 할머니 것에 못 미친다. 또 된장과 간장을 넣고 조린 깻잎 순조림은 들큰하니 뜨거울 때 계란 후라이 한 개 넣고 밥에 비벼먹으면 꿀맛이었다. 할머니 요리에 대해 말할라 치면 너무도 차고 넘쳐 2박 3일도 모자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입안 가득 침이 고여 힘들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서 인가 보다. 아는 맛이니깐.


1997년 작은 식품회사에서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근무를 하고 있는데 좀처럼 전화하는 법이 없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얼마 못 사시지 싶다고 전했다. 아들이 여섯이나 있었지만 할머니의 마지막은 오산 큰 이모댁에서 모셨다. 더 이상 기력이 없어 사람을 잘 못 알아보신다고 했다. 왠지 이번에 못 보면 살아생전 다시는 할머니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아 주말에 지하철을 타고 수원으로 가서 택시를 갈아타고 처음 가보는 오산의 한 병원으로 할머니를 보러 갔다. 병실에 들어서는데 가뜩이나 작은 할머니의 체구는 쪼그라 붙어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이 마치 초등학교 저학년의 몸이었다. 할머니를 부르니 할머니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눈으로만 나를 본다. 그리고 나를 알아보신다. 혜린이 왔니? 나만 알아보신다. 같이 간 동생을 못 알아보시니 욕심이 많은 동생이 나를 밀며 앞으로 나가 할머니에게 얼굴을 들이댄다. 큰소리로 "할머니 나는, 나는 몰라?" 별 반응이 없다. 그러면서 나한테 마른오징어와 시원한 싱건지 국물(동치미 국물)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이미 입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였는데... 이가 다 빠져 오징어는 씹지도 못하는데... 눈에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맛있는 걸 그렇게 챙겨주시던 할머니에게 그 흔해 빠진 오징어 하나 못 사드리다니...... 할머니를 만나고 온 그다음 주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도 살아생선 할머니를 보고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우리 엄마는 세 딸 중 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음식솜씨도 그중 하나였다. 어쩌면 할머니의 음식솜씨가 엄마에서 나에게도 딸려 온 게 아닐까 싶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결혼 안 한 막내삼촌이 귀향하여 외갓집 터에 별장처럼 집을 다시 짓고 살고 있었다. 여름휴가로 동생과 친한 언니와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대천으로 여행을 갔다. 가는 길에 외갓집에 들러 삼촌도 보고 옛 외갓집도 둘러보려고 계획을 잡았다. 일을 마치고 기차로 느지막이 출발하여 외갓집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다.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골의 저녁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보이지도 않았지만 옛날 외가댁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감나무가 있어서 외갓집임을 알 수 있었다. 하룻밤 자고 이른 아침 혼자 살고 있는 노총각 삼촌에게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대접하고 싶었다. 메뉴는 된장찌개였다. 나는 삼촌이 가꾼 앞마당 텃밭에서 둥근 호박하나와 청홍고추를 따서 들어왔다. 삼촌이 텃밭을 일구려 땅을 고르다가 발견했다며 그리 크지 않은 된장 항아리를 꺼내 주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남아있는 식구들을 위해 그득 만들어 묻어 놓았던 것이었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끈을 놓쳐버리고 채 그 된장 항아리의 소재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나 보다. 그러다가 삼촌이 발견한 것이다. 삼촌이 된장을 발견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할머니는 삼촌이 막내라서 같이 산 세월이 가장 짧아 언제나 애틋해하셨다. 삼촌은 그동안 차마 그 된장으로 음식들 해서 먹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날 아침 나는 밭에서 막 딴 싱싱한 야채를 넣고 할머니 된장을 듬뿍 퍼서 보글보글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내었다. 된장찌개 한 수저 입에 넣으니 목구멍을 타고 위로 뱃속으로 할머니 손이 쓸어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뭉근하게 뜨끈했다. 그 후로 할머니 된장으로 음식을 해 먹으면서 항 아릿 속 된장이 줄어가는 모습을 보는 삼촌의 마음은 어땠을까? 여하튼 나는 할머니 돌아가신 후 할머니의 된장을 먹은 유일한 손녀이다. 보고 싶은 우리 할머니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일등 수석 셰프가 되어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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