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인’ 너로 숨 쉬렴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어차피 금방 죽을 건데 뭐 하러 곤충을 키워, 의미 없어”
그들이 보는 건 숫자나 의미 기록들 뿐이지.
며칠을 사는지, 무엇을 해내는지,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하지만 장수풍뎅이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아. 누구도 놀라게 하거나 해치지도 않고,
자신의 존재를 그 누구에게도 설득하지 않지. 그저 자기가 허락받은 시간과 계절 안에서 묵묵히 자신답게
종족번식의 유일한 의무만을 다 하며 장수풍뎅이로 ‘살뿐’.
기억하니?
어렸을 때 길에서 장수풍뎅이 유충을 받아와 네 방에서 키웠던 일.
플라스틱 우유갑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유충은 흙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지.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너는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숨 막히진 않을까 걱정하며 뚜껑을 열어두기도 하고, 정성껏 돌봐줬지.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넌 그 보이지 않는 시간도 믿고 기다렸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어두운 흙속에서 굽은 자세로 방향도 없고 성충이 될 수 있을 거란 아무런 보장도 없는 시간이 꽤나 길었던 것 같아. 엄마는 사실 죽은 줄 알았어. 너 학교 간 사이 몰래 버려야 하나 고민도 했었거든.
얼마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밤, 네 방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소리에 잠에서 깬 너는 무서워서 엄마에게 달려왔고, 우리는 함께 방으로 가 봤지. 그 안에는 성충이 된 장수풍뎅이가 작은 플라스틱 곽 안에서 날갯짓하며 부딪히고 있었어.
그 소리는 마치 “나 여기 있어요! 살아 있어요!” 하고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단다.
숨겨졌던 생명이 격렬하게 존재를 알리는 순간이었지. 그날 밤, 우리는 함께 아파트 화단으로 나가 장수풍뎅이를 자연으로 돌려보냈어. 이름도 붙여주고, 그 순간을 동영상으로 남기던 너의 순수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살아있다는 건, 누가 알아봐 줘야 성립되는 것이 아니야. 긴 기다림 끝에 땅을 뚫고 올라와 단 한 계절, 숨겨졌던 날개를 꺼내고 거추장스러울 만큼 화려한 뿔을 달고 나타나는 것. 그것이 장수풍뎅이의 삶의 전부야. 의미 없다고? 허무하다고? 의미 없고 허무하다고 장수풍뎅이는 죽어 마땅할까? 대부분은 기다림이고, 눈앞의 시간은 비록 짧지만 불평 없이 자신답게 살다가 사라지는 생명. 그게 바로 장수풍뎅이인 거야. 그 한순간으로도 살았던 것은 분명하지. 어쩌면 우리 대부분도 긴 어둠을 지나 단 한 계절, 진짜인 너로서 존재하는 시간을 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단다.
누구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네가 너로 산다면 살아내는 하루가 충분히 의미 있다고.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장수풍뎅이가 딱 한 계절, 세상을 향해 존재를 드러내듯이, 너도 언젠가 네 안에 감춰졌던 날개를 펴고 나올 날이 있을 거야. 그 계절이 언제 올진 아무도 모르지만, 반드시 너만의 시간이 오고야 말지. 그러니 남이 만든 시간표에 휘둘리지 말고, 남의 인생을 복사하듯 따라가지 말고, 너로 살아라. 있는 그대로의 너,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흉내 내지 않아도 되는 너 자신으로.
그것이 짧아도, 작아도, 느려도 괜찮아. ‘살아있는 건, 바로 네게 주워진 생을 자기답게 살아내는 것’이란다.
고백하자면 엄마는 생명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늘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면서도 하루하루를 생명처럼 살지 못했어. 결혼을 하고, 너를 낳고 키우면서 매 순간 너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했어. 너는 따로 숨 쉬는 또 하나의 내 심장 같을 정도로 엄마의 가슴이 아닌 네 존재 안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며 살아왔단다. 엄마의 친구보다는 네 친구의 엄마와 더 친해지려 노력했었고, 엄마의 꿈보다는 너의 꿈만을 생각했어. 몸과 마음이 좀 힘들고, 괴로웠던 날조차 너를 위해 기꺼이 스케줄을 소화하려 노력했어. 너의 성장이, 발전이, 성과가, 기쁨과 관심이 온통 엄마의 관심사였어. 심지어는 직장조차도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초등학교로 취업하여 너희와 함께 출퇴근했었지. 흔히 맞벌이하는 아이들이 겪는 힘듦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밀착해서 너를 케어하며 일도 할 수 있었지만 육아와 가사와 업무가 분리되지 않아 엄마는 24시간 가동되는 느낌이었어.
엄마가 자초한 일이었지만 힘에 부치니 짜증도 많이 내고 점점 지쳐갔는데 그게 당연하고 행복인 줄 알았어.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텅 빈 껍데기에 불과했지. 너희를 잘 키워내는 게 가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다만 엄마는 엄마가 아닌 그 누구도 아닌 기계처럼 살고 있었던 거야. 엄마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고 집으로 매일 저녁 이웃과 지인들이 왔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이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야. 혼자 있든 같이 있든 항상 외롭고 허전했었어. 알맹이 없는 삶을 사는 엄마는 더욱 너희에게 집착했었고 그럴수록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더욱 커져만 가는 존재의 구멍을 걷잡을 수 없었단다.
요즘 엄마는 독서를 하고,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글을 쓰고, 또다시 악기연주도 시작하는 등 너도 알다시피 무지 바쁘단다. 너희 낳기 전까지 했었던 영양사업무도 다시 시작했어. 희한하지. 정말 바빠져서 힘든데 힘들지가 않아. 작은 목표도 생기고 꿈도 생기기 시작했단다. 가까운 미래에 엄마를 세워두고 꿈을 꿔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거든. 엄마가 좋아하는 게 뭔지 갑자기 누군가 묻는다면 머리가 하얘졌고, 모든 결정에 취사선택보다는 배려라는 명목에 숨어 생각조차 하기를 꺼려했었어. 엄마를 위한 선택은 안 해 본 지 오래라 어렵고 회피하게 되면서 엄마 스스로 엄마를 지우며 살고 있더구나. 그래서 엄마로 다시 살기 위해 노력 중이란다. 이 시간이 너무 귀해서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해.
엄마가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로 또 한 번 잔소리를 시작하면, 너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르지.
“그건, 엄마 세대의 뻔한 이야기야.” 그럼에도 아이야, 듣고 나서 결정해 줘.
나는 오늘 너에게 단순히 ‘죽음을 피하라’ 또는 ‘잘 살아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단지, 네가 이 세상과 너 자신을 다룰 때, ‘그게 진짜인 너로 살아 있는 것인지’를 한 번쯤 너 자신에게 묻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살아 있다는 것”은
첫 번째 감각이 깨어 있어 생명을 느끼는 일이란다.
얼마 전, 엄마는 애플민트 화분을 샀어. 올해는 이른 봄부터 여름처럼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다른 해보다 좀 일찍 샀어. 그런데 봄 날씨가 다시 쌀쌀해지면서 화분이 뒷전이 되었고, 며칠 전엔 완전히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더구나. 마치 “나 여기 있어! 나 좀 봐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서둘러 물 한 컵을 주었을 뿐인데, 몇 시간 뒤 다시 꼿꼿하게 살아나는 그 모습을 보며, 엄마는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고 강인한지를 다시 느꼈단다.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은 살아 있는 거야. 마음이 굳어져 아무것도 못 느끼게 될 때, 그건 생명이 아니라 기계지. 생물을 보든 무생물을 보든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공간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확연히 달라. 집에 화분하나, 꽃 한 송이, 고양이 한 마리 있고 없고는 공간의 숨결을 바꾸지. 그런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이 주는 것이 바로 ‘기척’이란다. 마치 애플민트가 물을 안 줬더니 바닥으로 축 쳐지듯, 매일 조금씩 피어나다 어느 순간 지는 꽃의 모습, 날마다 자라나는 화분의 잎의 크기, 햇빛 쪽으로 더 크게 자라 있는 아주 느린 움직임, 어제 깎아 준 것 같은데 어느새 또 북실북실 자라난 고양이 털과 날카로운 손톱. 살아있는 것들이 주는 ‘기척’은 말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작고 반복적인 변화들이 그 존재 만으로도 공간을 채우며 ‘살아있다’라고 말해주지. 생명이란 그렇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조용히 말을 걸고 있는 거야. 엄마는 네가 이런 생명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깨어있어 느끼는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단다.
두 번째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는 것이야.
사람들은 종종 숨 쉬고, 밥 먹고, 일하고, 잠자면 “살고 있다”라고 말하지. 또 어떤 사람들은 태어난 김에 그냥 사는 거라고 말하기도 하더구나. 하지만 그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일 뿐이지, ‘진짜인 너 살아 있다’는 건 아닐 수도 있어.
너희는 진짜 살아있는 게 무엇인지 의식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 있다’는 말을 쉽게 쓰는 세대야. 엄마는 네가, 생명에 관하여 또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 질문이야말로 생명을 대하는 첫 태도니까. 어린 시절 네가 장수풍뎅이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태도를 지녔던 것처럼 나이가 들면서 생명에 대한 더 큰 책임의 무게가 네게 실릴 거란다. 누구나 맹목적으로 어떤 책임의 무게를 짊어지라고 한다면 버겁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힘들어해. 그러니 너 스스로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네 생명은 더 절대적인 가치가 생긴단다. 신이 아닌 이상 어느 누구도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단다.
세포의 증식이 어떻게 제어되는지에 관한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폴 너스(Paul M. Nurse)의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도 결론적으로 ‘여전히 우리는 생명을 이해하는 과정에 있다’로 끝맺음을 한 바가 있어.
‘마음속 깊은 곳에 자기만의 생명을 담아두고 있는 당신, 그런 당신의 느낌이나 의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대답을 해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결국은 생명의 정의도 가치를 매기는 것도 각자의 몫이란다.
생명을 묻고 그 질문 앞에서 불편해하고, 회피하고, 때로는 방황하면서도 고민하는 사람. 그건 깨어 있는 생명이라는 증거야. 그러니 너는 충분히 고통스러우리만큼 너 자신에게 묻고 답하렴.
세 번째 자기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란다.
진짜 살아 있다는 건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실패하더라도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는 뜻이고,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의지이지.
얼마 전에 엄마가 20대 때부터 너무 좋아하는 가수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어. 아직 나이도 어린 유명 여자 배우가 같은 선택을 한 지 일주일 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져 충격이 더 컸었지.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도 1위로 제일 높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쉽게 생명을 놓아버려도 되는 걸까? 죽으면 정말 끝인 걸까? 살아있는 것보다 죽어버리면 더 편하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맹목적으로 쫓고 있는 가치들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인 걸까? 살아있어야만 다른 가치도 빛을 발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특히나 젊은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한 소식이 전해지면 생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놓아버리는 현실은, 우리가 진정 생명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끼고, 배우고, 알고 있는가를 묻게 해.
엄마로서 조금 먼저 산 사람으로서 생명을 경시하지 말고 자신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번 스스로 높이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 그리하여 자기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갖기를 바라는 게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단다.
마지막으로 진짜 살아 있다는 건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란다.
모든 생명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유기적 존재야. 레이첼 카슨은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일부이며 생명의 공동체 속에 속해 있다”라고 말했단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수많은 타자의 삶과 또 자연과 얽히고 스며들며 연결되는 일이란다.
생명을 염두에 둔 삶은 곧 관계 안에서 깨어 있는 삶이지. 이 말처럼 우리는 누구라도 다른 생명을 가볍게 여길 권한이 없어. 그럼에도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은 종종 생명의 본질적인 가치까지 훼손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단다.
엄마는 너만큼은, 다른 생명의 고통에 무감각하지 않은 사람,
자기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하루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아는 사람.
작은 생명 하나에도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길 당부한다.
그 사람은 단순히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 있는’ 사람인 것이야.
우리의 무관심으로 스스로 소멸하고 사라지는 생명들에 대해 사람도, 자연도 심지어 사물까지도 너무 무감각해졌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동물도, 물건도, 직업도, 말도 생명을 다 하고 사라져 버리지. 서서히 사라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들. 그 안에 깃든 생명의 존재의 무게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야.
다음번엔 이어서 생명 충만한 진짜인 너로 살기위해 엄마의 당부를 얘기해 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