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평생 다 쓰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있다면 개인 레슨만으로 발레를 배울건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대답은 명확히 ‘아니오’였다.
연예인들처럼 남들의 이목을 유난히 신경 써야 하거나, 정해진 그룹 수업에 시간에 맞추기 어려운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개인 레슨만으로 발레를 배우지는 않을 것 같다.
내게 발레의 또 다른 재미 중 하나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는 발메(발레메이트)들이다.
물론 말할것도 없이 개인 레슨을 통해 나만을 위한 피드백과 핸즈온을 받으면 실력은 훨씬 빠르게 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발메들이 없는 혼자만의 발레 수업을 지금만큼 즐기지는 못할 것 같다.
누군가는 발레 실력 향상을 최우선 순위에 둘 수도 있겠지만, 내가 발레를 계속하게 만드는 힘은 생각보다 실력의 속도와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지금 다니는 학원에서는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친분이 쌓이고, 가끔은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발메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전에 다녔던 두세 군데의 학원에서는 거의 매일 얼굴을 보면서도 가볍게 눈인사만 나눌 뿐 사적인 친분을 쌓은 사람은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각자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취미 발레를 하는 사람들 중엔 외향형 보단 내향형이 상대적으로 더 많기 때문에 누군가 먼저 나서 친분을 만드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그런 걸 보면 수강생들 사이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학원의 분위기에 상당 부분 좌우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수강생들끼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모두에게 편안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수강생들 사이의 친밀함이 과한 친목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혹시라도 관계가 틀어졌을 때 그 여파가 수업에까지 미칠 수도 있다 보니 수강생들 간의 친분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발레는 용어도 어려운 데다 아직까지는 대중적인 취미가 아니라 학원 밖에서는 발레 이야기로 공감받는 게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나 같은 발치광이에게는 발레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까지 발레에 열심인지, 어떤 점이 힘든지, 발레에 진심인 사람들끼리만 자연스럽게 공감되는 포인트들이 있다.
같은 음악을 나누며, 같은 호흡을 내뱉고, 같은 순서로 몸을 움직이다 보면 말없이도 전해지는 감정들이 있다. 다 같이 다음 순서를 까먹어버려서 거울 속에서 흔들리는 눈빛을 교환하다 결국 다 같이 틀려버리고 민망하게 웃어버리는 순간들. 모두가 실수 없이 순서를 마무리했을 때, 박수도 환호도 없지만 혼자서 조용히 느끼는 뿌듯함. 그런 소중한 순간들은 꼭 사적인 친분을 나누지 않아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저 취미로 발레를 즐기는 우리는 수석 무용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도 아니고, 전공 입시를 앞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우리의 발레 실력을 점수나 등수로 매기지 않는다. 물론 취미 발레로도 콩쿠르에 나가면 순위가 정해지긴 하지만, 적어도 함께 듣는 클래스 안에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메의 성장을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때로는 부럽고 조급해지기도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스스로를 다잡는 동기가 되곤 한다.
발레는 결국 혼자 하는 동작들의 연속이지만, 혼자보다 함께할 때 확실히 더 재미있다. 발메들은 친구라고 부르기엔 멀고 타인이라고 부르기엔 좀 더 진한 동지애를 공유하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그런 사이이다. 하지만 이렇듯 느슨한 연결고리를 가진 발메라는 존재가 내게는 발레를 지속하는 힘이 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그 시간이 내게는 발레의 묘미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