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인들의 슈퍼볼, 프리 드 로잔

by 서린

미국 전역이 슈퍼볼로 들썩이는 계절이 되면, 유럽의 작은 스위스 도시 로잔에서는 ‘발레인들의 슈퍼볼’ 프리 드 로잔(Prix de Lausanne)이 펼쳐진다. 슈퍼볼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어린 무용수들이 타이즈에 레오타드, 슈즈만으로 조용히 무대를 채운다.


로잔 콩쿨 출신 한국 무용수 중에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역시 한국에서 발레가 대중화되기 한참 전인 1985년 우승을 차지한 강수진 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일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수석 무용수 서희도,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된 김기민도, 파리 오페라의 에투알(수석무용수)인 박세은도 모두 로잔 출신이다.




프리 드 로잔은 15세에서 18세 사이의 학생들이 참가하는 콩쿨이기 때문에 이미 완성된 스타보다, 아직 이름 없는 글로벌 발레 원석들을 발견하는 기회이다. 그래서 유명한 발레단의 클래스를 지켜보는 월드발레데이(World Ballet Day)나 유명한 무용수들의 공연과는 또 다른 보는 재미가 있다.


참가 학생들은 입상 결과에 따라, 또는 입상 결과와 상관없이, 세계 유수의 발레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거나 해외 발레단 연수/입단 제의를 받는, 그야말로 미래의 커리어와 연결되는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거의 일주일에 걸쳐 매일 반복되는 클래스와 무대에서 심사위원들은 무용수의 테크닉뿐만 아니라 태도와 가능성도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올해의 프리 드 로잔 경연에 참여한 78명의 학생들 중 한국 학생들은 총 19명, 그중 파이널리스트에 선정된 21명 중 6명이 한국인이었다. 본선에 오른 6명의 한국 학생들은 모두 입상을 했고, 그중 염다연 학생은 준우승이자 여자 참가자 1위, 관객상까지 거머쥐었다.


염다연 학생은 이미 탄탄한 실력으로 발레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고 1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근엔 크고 작은 공연에서 주역으로 데뷔할 정도의 프로급 발레리나인지라 어느 정도의 수상은 예견된 바이긴 했다.


작년엔 박윤재 학생이 한국 발레리노로는 처음으로 로잔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한국은 이제 떠오르는 발레 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보탠 것 하나 없는 나지만 괜스레 내 마음이 뿌듯해지는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프리 드 로잔 2026에서 준우승과 관객상을 차지한 염다연 발레리나


하지만 참가자 명단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타공인 발레 강국인 러시아 참가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탄탄한 양성 시스템이 갖춰진 러시아나 미국 등 발레 강국의 무용수들에게 프리 드 로잔은 필수 코스라기보다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에 가까운 반면, 그 외 국가의 학생들에게 프리 드 로잔은 해외 무대 진출을 위한 좋은 창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이 나의 뿌듯함을 줄어들게 하는 요소가 되진 않는다. 한국 학생들의 역량이 실제로 아주 뛰어났고 난 그들이 자랑스러웠으니깐 말이다.




로잔 무대에 오르는 학생들 가운데에는 주니어 그룹이라 불리는, 아직 중학생에 불과한 15~16세의 아이들도 있다. 어린 나이에 저 실력을 쌓기까지 또래들처럼 맘껏 놀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참고 고통을 참으며 묵묵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왔을지, 그 시간들을 상상하게 된다.


곧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우리 집 아들내미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데, 불과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아이들이 낯선 해외의 무대에서, 수많은 어른들의 시선과 평가, 압박감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먹먹해지며 로잔의 어린 무용수들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든, 그 나이에 그 무대에 서기까지의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고 응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콩쿨이라는 건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가능성과 실력을 평가받는 자리일 수밖에 없지만, 이미 그 존재만으로 스스로 많은 것들을 증명해 낸 아이들이니까. 그들이 언젠가 세계를 무대로 마음껏 춤추는 무용수들이 되길, 조용히 응원해 본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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