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발레복이 상당히 많다. 추측컨대 아마도 취미 발레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발레복 컬렉션으로는 상위 1%쯤 되지 않을까 싶다. (0.1%가 아니라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 발레의 재미에서 발레복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 절반까지는 아니어도 40% 정도는 되지 않을까.
발레를 시작하기 전부터도 패션에 관심이 많고 옷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발레를 시작하면서 평소에는 입을 일 없는 화려하고 예쁜 레오타드와 하늘하늘한 쉬폰 스커트에 눈이 돌아가 버린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취미 발레를 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본적인 입시 레오타드 몇 벌을 돌려 입으며 발레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고, 집에 있던 티셔츠를 대충 걸친 듯한 복장으로 발레를 하는 고수들도 많다. 비싼 발레복을 사느니 그 돈으로 수업을 더 듣고, 개인 레슨을 받아 실력을 키우겠다는 이들의 선택 역시 충분히 존중한다. 어떤 복장이든지 발레만 잘하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
다만 그들과 달리, 나에게는 예쁜 발레복을 차려입는 일이 발레를 계속하는 큰 즐거움 중 하나일 뿐이다. 개인의 선호에 정답이란 건 없다.
남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 나는 발레 수업 두 번째 시간부터 풀착장으로 수업을 들었지만, 취미발레 카페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모두가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이 레오타드 입고 싶은데 입어도 될까요?”
“실력에 비해 너무 과한 것 같아요”
“실력도 없는데 옷만 화려하게 입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까봐 걱정돼요”
“발레복은 예쁜데 살이 너무 쪄서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일까봐 못 입겠어요”
이런 글들이 많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온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 일에 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야하는 걸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은 내 발레복에도, 내 군살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물론 수지의 발레복에는 모두가 관심을 갖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수지가 아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엄청난 자유가 찾아온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남의 시선이 두려워서 이 짧은 인생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미루고, 입고 싶은 발레복을 포기하는 건,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실력은 안 되면서 발레복만 화려하게 입는 사람을 두고 ‘패션 발레’라고 은근히 낮춰 부르는 경우도 물론 없진 않다. 어디나 그런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전공도 아닌, 발레를 순전히 취미로 소비하는 입장에서 ‘패션 발레’를 하면 안 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특히 취미로 발레를 오래 했거나 과거에 전공으로 발레를 했던 사람들 중엔 (일부이긴 하지만) '발레는 이래야 한다'는 타협불가능한 영역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나는 너희와 달리 '패션'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자부심에서 나온 은근한 급 나누기이거나.
그러든가 말든가, 어차피 나는 내 발레복에 걸맞은 실력(이란 게 정말 있긴 한거라면)을 갖추려면 10년으로도 모자랄 것 같아서 그냥 입고 싶을 때, 입고 싶은 걸 입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대문자 T’라서 가능한 사고일 것 같긴 하지만, '실력도 없는데 옷만 화려하게 입는다'는 말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실제로 들은 적은 없지만) 딱히 상처받을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억울할 것도 없달까.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겠다고 선택하는 편이 훨씬 솔직한 거 같기도 하다.
이런 현상이 발레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한국에서는 유독 취미를 즐길 때조차 ‘자격’과 ‘기준’이 따라붙는다. 러닝 붐이 일면서, 실력은 초보인데 장비는 프로처럼 갖춘 사람들을 ‘패션 러너’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골프, 등산, 헬스,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발레 실력이란 건 점수나 수치로 환산될 수 없으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취미마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서로에게 엄격한 걸까. 내 마음에 드는 장비를 내돈내산 해서 취미를 즐기겠다는 것마저, 고깝게 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없는건지 오히려 안타까울 때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장비로라도 운동을 향한 의욕이 유지된다면 그것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운동을 하는 건, 얼마나 건전한 소비인가. 몸에 해로운 술을 마시며 돈을 쓰는 것보다, 평생 함께 살아야 할 내 몸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훨씬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발레는 서른 후반에야 비로소 갖게 된 소중한 인생 취미이자 운동이다. 이 나이에 새로 시작한 무언가를 오래 붙잡고 가기 위해서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예쁜 발레복으로라도 그 동기부여가 유지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인상 깊게 읽었던 멜 로빈스의 『렛뎀 이론』에서 누누이 말하듯,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들의 몫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고, 나는 내 순간에 충실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