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쯤엔가 첫째와 잠자리에 들기 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가 불쑥 물었다.
“엄마, 혹시 엄마가 산타야?”
헉, 올 것이 왔다.
‘그래, 5학년까지 버텼으면 오래 버틴 거지. 이제 모르는 게 이상한 나이이긴 해.’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아쉬웠다. 이제 알 때가 됐다는 걸 알지만, 조금만 더 내 품 안의 어린아이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나의 헛된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무래도 작년 크리스마스에 내가 먼저 의심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갖고 싶은 장난감 같은 건 없어진 고학년 남자아이에게 대체 무슨 산타 선물을 준비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산타할아버지한테 뭘 달라고 할 건지’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내 예상대로 특별히 갖고 싶은 게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산타할아버지한테 구글플레이스토어 카드 달라고 해도 될까?”
게임 자체를 막지는 않지만, 현질만큼은 허락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아이는 게임머니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구글플레이스토어 카드가 갖고 싶었나 보다. 나는 다급히 대답했다.
“구글플레이스토어 카드는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그런 현금성자산은 선물로 주지 않으셔.”
경제학을 전공한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 초등학생 아이에게 ‘현금성자산’이라는 전문용어까지 동원해 버렸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이의 눈초리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더 당황한 나는 급히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엄마는 산타할아버지 연락처도 있으니까 다 알지.”
아마 그때부터였지 않을까. 첫째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 게.
나의 불찰이다.
아니다. 아이는 그냥 알 때가 된 거다.
하지만 그 일이 아니었으면 1년 정도 더 속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질척한 미련만 남는다.
나는 결국 ‘엄마가 산타냐’는 아이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말을 돌리고 말았다.
“왜? 엄마가 할아버지 같이 생겼어? 근데 그거 알아? 산타할아버지는 산타를 믿는 어린이들한테만 선물을 주신대. 너 이러다 이제 선물 못 받는 거 아냐?”
아이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는 엄마의 동심(?)을 위해 속아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딱히 원하는 건 없지만 아무것도 안 받는 것보단 뭐라도 받는 게 낫다는 셈이 선 걸까.
한편, 아직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2학년 짜리 둘째는 오빠의 이런 태도가 못내 불안하다. 자꾸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는 오빠 때문에 자기도 덩달아 선물을 못 받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오빠가 의구심을 드러낼 때마다 오빠를 막아서며 말도 못 꺼내게 한다.
둘째는 크리스마스가 오기 한 달 전부터 이미 산타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카드에 적어 트리 밑에 놓아두었다. 작년까진 스케치북에 써서 현관 앞에 놔둔 덕분에 슬쩍 열어보면 되었는데 올해는 편지지에 써서 봉투에 넣고 스티커까지 아주 야무지게 잘 붙여두었다. 육아 난이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훅 올라간다. 나는 트리 아래 놓인 그 카드를 볼 때마다 ‘저 스티커를 어떻게 티 안 나게 몰래 뜯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사실 둘째가 올해 산타 선물로 원래 원하던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카드를 쓰기 전 제 입으로 자기는 올해 산타 선물로 ‘밀가루’를 받고 싶다고 쓸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유튜브에서 밀가루로 뭔가를 만드는 영상을 본 뒤 줄곧 밀가루를 사달라고 졸라왔었는데, 나는 그 밀가루 난장판을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아 밀가루는 안 된다고 몇 번을 거절했던 터였다.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된다’는 고리타분하고 그럴싸한 핑계로 나의 귀찮음을 잘 포장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산타 선물로 고작 밀가루라니…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의 순수함에 헛웃음이 나면서도, 엄마가 안 사주는 밀가루를 산타할아버지한테 부탁하는 걸 보니 얘는 아직 산타가 엄마인 걸 모르는구나 확신했다.
산타 선물로 정말 밀가루를 주기는 아무래도 좀 그래서, 밀가루가 그렇게까지 갖고 싶었나 괜히 짠해져서, 결국 며칠 뒤 밀가루를 한 봉지 사다 주었다. 물론 제일 작은 걸로. 고작 몇 천 원짜리 밀가루 한 봉지를 사주면서 “역시 엄마가 최고지?” 온갖 생색은 다 내고 뽀뽀를 100번쯤은 얻어냈을 것이다.
밀가루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기뻐하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어른들의 예상과 달리 아이들이 원하는 건 정말 별것 아닌 경우가 많다. 결국 나는 밀가루를 사준 대가로 그 난장판의 뒷정리를 할 때마다 속이 터지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의 활짝 웃는 얼굴과 쏟아지는 뽀뽀 세례와 맞바꾼, 나의 자업자득이니까.
나는 언제쯤 산타의 진짜 정체를 알아차렸을까? 사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기억나는 건, 내가 꽤 이른 나이에도 산타의 존재를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TMI이긴 하지만, 나의 MBTI는 파워로봇 대문자 ISTJ다.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하진 않은, 나름 분석적인 어린이였던 나는 동화 속 산타할아버지는 말이 안 된다고, 당연히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 밤마다 집에 배달되는 선물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추측 끝에 혼자만의 결론에 도달했다. 산타할아버지는 분명 동사무소 직원일 거라고.
동네 어린이들이 어디에 사는지, 집집마다 주소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은 동사무소 직원뿐이니까. 그리고 엄마 아빠들은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아이들이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미리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 애들은 이 ‘동사무소 직원 산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어댄다. 나 역시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 옛날 어린 내가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약간 허당 똑똑이 같은 면이 있다.
사실 첫째는 엄마가 산타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기 전부터 이미 산타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산타할아버지는 어린이집에도 오고, 쇼핑몰에도 있고, (본 적은 없지만) 우리 집에도 오니까. 산타할아버지가 저 멀리 북극에 살며 루돌프가 끄는 썰매를 타고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다고 믿기에는, 유치원생이 보기에도 산타는 너무 자주, 너무 여러 명이 출몰했다.
그래서 첫째의 추측은 산타할아버지는 일단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고, ‘산타할아버지’라는 직업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평소엔 각자 다른 일을 하다가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산타할아버지로 직업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꽤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과연 그 엄마에 그 아들답다. 아들 화이팅!
올해 크리스마스엔 여수로 짧은 가족 여행을 가게 되었다. 둘째는 산타할아버지가 어떻게 여수의 호텔까지 잘 찾아오실지, 혹시 우리를 못 찾아서 올해 선물을 못 받게 되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
여행짐을 최대한 덜고 싶은 내가 “엄마가 산타할아버지한테 우리 여행 간다고 말을 안 했으니, 아마 우리 집 트리 아래 놓고 가시지 않을까?” 했더니 “산타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 둘째가 갸우뚱한다.
아차, 또 들킬 뻔했다. 자나 깨나 말조심.
어쩔 수 없이 여행 가방에 선물까지 챙겨가야 하나? 그러다 오히려 들킬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가져갔다 가져오는 건 너무 번거로운데? 그나저나 스티커로 봉인된 산타 편지는 언제 티 안 나게 열어보지? 첫째 선물은 그래서 대체 뭘 사야 하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수록 엄마의 고민은 깊어진다.
그리고 나는 30년 전 티 낼 수 없는 비슷한 고민을 하고 나랑 내 동생이 잠들기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선물을 준비했을 우리 부모님을 조용히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