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느닷없이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어릴 때 부자였어? 가난했어?”
평생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이라 순간 멈칫했다. 이제 막 돈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품을 법한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내 어머니는 평생 전업주부로 가정을 돌보셨고, 아버지는 평생 직업 군인으로 혼자 벌이를 담당하셨다. 객관적으로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자라는 동안 가난하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엄마는 어릴 때 부자도 아니었고, 가난하지도 않았고, 그냥 보통이었어.”
그러자 아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어릴 땐 보통이었는데, 지금은 부자가 된 거야?”
아이의 눈에는 내가 부자로 보였나 보다. 나는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약간 민망해 웃었다.
“왜? 엄마 부자 같아?”
내가 되묻자 아이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응. 엄마는 내가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다 사주고, 장난감도 사주고, 그러니까 부자잖아.”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의 귀여운 오해로 웃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래, 그 정도면 부자지. 별 게 부자인가? 아이가 먹고 싶다는 간식, 갖고 싶다는 장난감을 큰 고민 없이 사줄 수 있는 것. 별것 아닌 듯 해도, 그 정도면 충분한 풍요로움이다.
나는 늘 부자를 더 먼 곳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더 큰 집, 더 비싼 차, 남들보다 앞서는 숫자들.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더 나아가 아이들까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비로소 부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늘 스스로를 ‘아직 부족한 사람’으로 규정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미 가진 것보다 아직 부족한 것을 더 많이 세면서.
아이가 자랄수록 질문의 난이도는 점점 올라간다.
"엄마, 회사에서 돈 몇 개 받아?" "엄마 100개 받아." "와, 엄청 많이 받네" 하던 그 아이는 이제 최저 시급도 100만원은 넘는다며 '월급 100개설'을 믿어주지 않는다. 아이는 그렇게 조금씩,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아가고 있었다.
엄마가 당연히 부자인 줄 알던 그 아이가 자라, 어느덧 열한 살쯤 되었을 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엄마, 나는 무슨 수저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세상이 사람을 나누는 방식에 조금씩 노출되고 있었다. 아이의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과 함께 조심스러운 불안이 섞여 있었다.
부자인지 아닌지, 어떤 수저인지는 사실 누군가가 대신 정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숫자로 단정할 수 있는 것도, 모두가 동의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은 내가 내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무엇을 가치 있다고 믿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아이가 무심코 던지는 질문들은 나를 자주 멈춰 세운다. 앞으로 아이는 자라면서 수많은 비교와 평가, 세상의 잣대를 접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흔들릴 수도 있고, 스스로를 작게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알게 되길 바란다. 어떤 수저를 물려 받았든, 그걸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바꿀 수 있는 힘이 결국 자신에게 있다는 걸.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야 비로소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그 날 아이와 수저와 돈, 행복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끝에,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엄마는 이재용이 부럽지 않다고, 지금의 소소하고 행복한 삶이 좋다고.
그러자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다이아수저나 24K 금수저는 좀 부담스러우니 자신은 18K 금수저 쯤이 딱 좋을 것 같다고, 아주 야무지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역시, 금이 좋긴 좋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