育兒 대신 育我
작년에 첫째가 4학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내겐 여전히 귀여운 어린아이인데 어느덧 ‘고학년’이 되어버린 현실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던 시기였다.
그날도 나는 평소처럼 내 눈에 마냥 귀여운 아이를 습관처럼 끌어안고 엉덩이를 토닥이면서 “우리 뀨뀨는 고학년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귀엽지? 뀨뀨는 언제까지 귀여울 거야?” 같은 주접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물론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온 아이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엄마가 귀여워할 때까지?”
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는 것 같은 우문현답이었다.
아이는 순리대로 자랄 뿐인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른의 마음만 늘 한발 늦게 변한다.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어른스러워지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자라나며 부모의 손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은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늘 한 박자 늦다. 내 눈에는 여전히 귀엽던 세 살, 다섯 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어쩌면 아이는 이미 스스로가 엄마의 눈에만 어린아이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저런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장면이 또 하나 있다. 몇 년 전쯤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을 떠나던 날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에 일찍 도착해 전망대에서 끊임없이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탈것’이라면 다 좋아하던 아이가 마냥 신기해할 거라고 단순히 생각하며 나는 말했다.
“와, 뀨뀨야, 저기 비행기가 활주로 달리는 거 보여?”
“응, 엄마, 근데 저건 활주로가 아니라 유도로야.”
그러고는 나도 몰랐던 활주로와 유도로의 차이를 한참 설명해 줬다. 나는 살짝 머쓱해졌다.
내가 알려주지 않은 것들을 아이가 어느새 알고 있을 때, 나는 신기하고 대견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거리감을 느낀다. 네 살이 되도록 자기 이름도 말 못 해서 스스로를 ‘응애’라고 부르던 그 어린아이가 이제는 내가 모르는 걸 알려주고 있다니.
며칠 전엔 잠들기 전에 자기는 빅뱅의 ‘Last Dance’를 좋아한다며 한 번 같이 듣자고 했다. ‘내가 알려준 적 없는 노래를, 그것도 요즘 노래도 아닌 이 곡을… 얘는 대체 어디서 듣고 아는 거지?’ 싶으면서 또 한 번 약간의 거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흘러나온 첫 소절.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도 저물고~
이젠 그 흔한 친구마저 떠나가네요~
나이가 들어서 나 어른이 되나 봐요~”
‘아니, 초등학생이 사랑이 저물고 친구가 떠나가고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된다는 이 가사에 공감을 한다고?’ 왠지 어울리지 않는 그 감성에 나는 결국 웃어버리긴 했지만, 그 사이로 스며드는 묘한 거리감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이가 어릴 땐 부모가 아이의 세계를 거의 전부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어느새 아이는 내 손이 닿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조금씩 키워가고 있었다.
첫째는 벌써 5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어 ‘이러다 좀 있으면 중학교 간다고 하겠네’ 말이 절로 나오는데도 내 눈엔 여전히 귀엽다. 아직 2학년인 둘째는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사랑스러움 그 자체이다.
흔히 아이들은 세 돌까지 평생 할 효도를 다 한다던데, 우리 애들은 여전히 이렇게 귀여우니 효도를 꽤 오래 하는 셈이다. 그런데 중학생 아들을 키우는 친한 언니는 자기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아들도 아직 귀엽다고 한다. 남들은 이해 못 할 귀여움이 엄마들의 눈에는 여전히 남아 있나 보다.
결국 아이의 ‘귀여움’은 아이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여전히 사랑스러움을 발견해 내는 엄마의 마음에 달린 게 아닐까. 아이는 점점 부모의 품에서 멀어지고, 언젠가는 품을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오더라도 내가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다정한 마음만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