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 일기28
어릴 적, 어머니는 매 끼니 상추를 내놓으셨다.
결혼 후 식성이 많이 변해 상추를 거의 먹지 않았는데,
요즘 다시 상추를 많이 먹고 있다.
고기를 비롯한 기타 반찬들이 별로 당기지 않는다.
어릴 적, 제법 책들을 많이 읽었다.
젋어서는 먹고 산다는 핑계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요즘 들어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
눈이 침침하지만 그래도 재밌고 평안하다.
어릴 적, 영화는 나의 구원이었다.
그 후로 직장생활에 허우적대면서 영화 한 편 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요즘 들어, 간간히 영화도 보고 있다.
차분히 사색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어릴 때 짠반찬이 필요할 때마다 엄마가 해 주던 조개 조림도 생각난다. 이사다녔던 많은 집들도 떠오른다. 나고 자랐던 도시도 그립다. 의형제를 맺었던 중학교 5인방도 보고싶다. 어릴 적 마당에서 함께 뒹굴던 강아지 '럭키'도 눈에 선하다. 즐겨듣던 음악들을 시간이나 공간에 구애없이 듣기 위해 유튜브에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나를 거절했거나 내가 거절했던 여인들도 떠오른다. 직장을 옮길 때마다 만났던 지인들도 보고싶다. 삶이 이리 빠를 줄 몰랐다.
수구초심.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自己)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뜻으로, 고향(故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
어릴 땐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릴 때 뿐인가. 청년, 장년이 되어도 그 의미는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이제 예순 중반을 지나면서 비로소 그 의미가 조금씩 마음에 와 닿는다.
과거의 모든 것이 아스라히 떠오르며 그립고 또 그립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건가.
#수구초심#죽음#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