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ng in Houston Aug 09. 2021

눈의 선녀, 설미호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눈의 여왕>

“옛날, 아주 먼 옛날. 눈 덮인 깊은 산속에 눈의 선녀, 설미호가 살고 있었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한번 그녀를 보면 동물도, 사람도, 심지어 신조차도 그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단다. 모두가 아름다운 설미호를 사랑했지만 설미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어. 설미호는 산에 온 나무꾼이나 사냥꾼을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유혹했지. 그리고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어.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사냥꾼이 눈 덮인 산속에서 쓰러져버렸어. 몇날며칠동안 물 한 모금, 밥 한술 먹지 못하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채 오지 않는 설미호를 기다린 거야. 쓰러진 사냥꾼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하지만 설미호는 슬퍼하거나 자책하지 않았어. 이에 화가 난 하늘신은 설미호에게 벌을 내렸어. 아름다운 설미호의 모습을 낮에는 흰여우로 바꿔 사냥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게 했지. 하지만 설미호를 사랑한 하늘신은 설미호에게 용서 받을 기회를 주기로 했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저주를 풀고 다시 선녀가 되게 해주겠다고 말이야. 흰여우로 변한 설미호는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어. 그랬더니 설미호가 살던 산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따뜻한 햇볕이 비춰도 절대 녹지 않는 얼음산으로 변해버렸어. 그래서 눈보라가 휘몰아쳐 오는 날은 설미호가 슬퍼서 우는 날이라고 한단다. 그 뒤 설미호는 저주를 풀기위해 마을로 내려와 한 남자를 만났지만 자신의 구슬을 빼앗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다시 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대. 설미호의 심장은 눈처럼 투명한 구슬로 되어 있는데 그 구슬을 얻으면 세상의 모든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거든.”

  “아빠, 그럼 그 구슬만 있으면... 우리 게르다의 병도 나을 수 있는 거예요?”

 열 살 남짓. 매서운 겨울바람에 볼이 잔뜩 얼어붙은 케이가 말했다. 케이는 겨울 산에 올라 아침부터, 해가 지는 지금까지 아빠 옆에서 꼼짝없이 소총을 쥐고 엎드려 있었다. 사냥감을 기다리며 장포의 총구를 겨누던 아빠는 자신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을 걱정하는 케이를 바라보았다. 사냥꾼인 아빠를 따라 첫 사냥을 나온 케이는 또래보다 큰 키와 다부진 어깨를 가졌지만 눈빛에는 아직 초롱초롱 동심이 남아 있었다. 죽은 엄마를 닮아 큰 눈망울과 붉은 입술을 가진 케이는 얼핏 보면 소녀처럼 예쁜 얼굴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래, 그러니 설미호가 나타나면 심장을 달라고 부탁해보자.”

  “부탁이요? 사냥하는 게 아니라요?”

  “설미호의 심장은 스스로 뱉어서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 억지로 배를 갈라 꺼내려고 하면 그 안에서 구슬이 사라져 버리거든.”

  “그럼 구슬을 어떻게 얻어요! 심장이 없으면 죽을 텐데, 그냥 줄 리 없잖아요!”

  “아마...  설미호는 사랑하는 사람에겐 심장인 구슬을 꺼내주지 않을까? 진짜 사랑한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테니 말이야.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할 용기를 주거든.”

  “엄마... 처럼요?”

 케이는 오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날 밤을 떠올렸다. 마을 어귀에 지은 나무집에 큰 불이 난 날, 엄마는 케이와 게르다를 안고 집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밖에서 잠겨 열리지 않았다. “그걸 주면 아이들만은 살려주지.” 굳게 닫힌 문 뒤에서 굵은 목소리의 산적들이 말했다. 엄마는 불길이 치솟는 집에서 두 아이를 감싸며 기도하듯 울었다. 케이가 화마의 열기로 정신을 잃어가다 마지막으로 본모습은 엄마의 눈물이 허공에 떠올라 흰 눈이 되어 다시 내리는 것이었다. 

 11월에 기적적으로 내린 폭설에 두 아이는 무사할 수 있었다. 가족을 위협하던 산적들도 눈보라에 꽁꽁 얼어버렸다. 그리고 엄마도 사라졌다. 아빠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불길에 엄마의 온몸이 녹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게르다와 케이 그리고 아빠는 깊은 산속에 나무집을 짓고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살았다. 

 케이는 자기가 본 일을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아이를 꼭 껴안고 울었다. 케이는 자신의 볼에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을 맞으며 괜히 아빠를 울렸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 애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동생 게르다는 화재 이후 줄곧 시름시름 앓았다. 의사는 게르다가 연기를 많이 마셔 폐를 다쳤다고 했다. 게르다는 학교 갈 나이가 돼도 걷지도 뛰지도 못하고 줄 곳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밝고 쾌활한 아이로 언제나 자신을 걱정하는 아빠와 오빠를 위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게르다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의사는 세상에 있는 약 중에 게르다를 구할 수 있는 약은 없다고 말했다. 아빠는 의사를 배웅하고, 바로 장포를 꺼내 사냥에 나설 준비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먼저 총을 쏘면 안 돼.” 아빠는 스스로 소총을 꺼내 자신의 옆에서 서툰 기름칠을 하는 케이를 보며 말했다. 케이는 대답 대신 가상의 적을 향해 조용히 소총을 겨누는 연습을 했다.  

 “저녁 먹을 때까지 돌아올게.”

집을 나오기 전, 게르다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며 케이는 약속했다. 게르다는 큰 눈을 끔벅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바스락! 바짝 마른 겨울 풀숲 사이로 흰여우가 나타났다. 조금씩 천천히, 지는 해를 등지며 흰여우가 케이와 아빠를 향해 다가왔다. 붉게 물들어가는 흰여우의 털을 보며 케이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흰여우가 사정거리를 넘어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도록 아빠는 총을 쏘지 않았다. 총구로 흰여우를 겨누는 아빠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케이의 뺨에 또다시 오 년 전과 같은 뜨거운 아빠의 눈물이 떨어졌다. 아빠는 흰여우를 보며 흐느끼고 있었다. 흰여우의 깊은 눈망울에 슬픈 아빠의 얼굴이 비쳤다.

 “우리 게르다가 많이 아파. 너의 심장이 필요해.... 설미호.

흰여우는 아빠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낮고 구슬프게 울었다. 그리고 아빠의 머리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아빠는 흰여우의 공격에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케이는 손에 쥐고 소총을 쐈다. 탕! 탕! “안 돼!”

 구름이 지나가고 난 뒤 나타난 보름달 아래, 엄마는 아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는 피가 흘러나오는 엄마의 배를 있는 힘껏 강하게 눌렀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이제... 당신 머리에도 흰털이 났네요.”

엄마는 희긋희긋한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눈물을 흘렸다. 하늘에서 조금씩 흰 눈이 내렸다. 엄마는 아빠의 입에 키스했고, 아빠는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처럼 맑고 투명한 구슬을 뱉었다.

 “케이, 동생을 잘... 부탁한다.”

 “엄마!”

 케이는 들고 있던 소총을 떨어뜨리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케이와 아빠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눈송이로 변해 하늘로 올라갔다. 마치 선녀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오빠와 아빠를 기다리며 시름시름 앓던 게르다의 이마에 눈송이 하나가 떨어졌다. 게르다는 꿈속에서 사진에서만 보던 엄마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케이가 엄마의 숨결이 묻은 구슬을 게르다의 입에 넣어주었다. 게르다의 창백했던 뺨에 빨갛고 고은 혈색이 돌았다. 그리고 그날 온 세상을 포근히 감싸주는 흰 눈이 펑펑 내렸다. 

작가의 이전글 렛 잇 슬로우 인 휴스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