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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민 Oct 29. 2022

회사 밖 세상은 말야

책방 풍경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책방 앞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면 빨간 벽돌 건물에 초록색 지붕을 가진 책방이 더 멋스러워진다. 은행나무 색깔이 사계절을 돌아 다시 노랑으로 돌아올만큼의 시간이 지나 책방에도 꽤 익숙해졌지만 이따금 처음 최인아책방을 방문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 때는, 하얀 재가 되기 직전이었다. 7년째 무역회사를 다니던 나는 그 해 3월 해외영업팀으로 부서를 옮겨 Rachel이 되었다. 회사 창립이래 해외영업팀에 여직원이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이전엔 주로 한국으로 들어오는 수입 화물을 세관에 신고하는 서류 업무를 해 왔다면 해외에다 영업이 붙은 이 곳에서는 사건사고가 터지면 해외 파트너들과 합의하고 대체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사고는 천재지변부터 화물 데미지까지 한정이 없었다. 또는 글로벌 기업들의 화물을 유치하기 위해 공개 입찰에 참여하려 요율표를 만드는 데 전 세계 200여개의 항구별 해상 운임을 책정하는 일을 하거나 신규 해외 파트너와 손발을 맞추는 일까지 무엇 하나 가벼운 일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부서를 옮기면서 참여하게 된 매주 월요일 임원 회의였다. 깜깜하고도 매서운 겨울 아침 7시반, 차디찬 공기를 뚫고 출근해 회장님 포스의 검정 의자에 앉아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1시간이 넘도록 임원진과 팀장들의 주간 업무 보고가 이어진다. 처음 몇 주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는 것 같았다. 어릴 적 명절에 고스톱 치는 어른들 사이에 앉아있는 아이처럼 좀처럼 회의실 속 내자리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더이상 관람객이 아닌 차례가 오면 발언을 해야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현실이 낯설었다.

 

그 보고를 위해 매주 금요일 오후면 퇴근 직전까지 파일명 회의록이라는 빈 엑셀 파일 앞에서 머리를 쥐어짰다. 마치 7년 전 비전공자로 무역회사에 와서 전문용어가 섞이면 한 문장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나처럼 이질감이 들었다. 높은 직급과 닿을수록 빤히 보이는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것이, 애써 번지르르하게 포장해야 하는 것이 쉽사리 되지 않았다. 지나고나서야 그것 또한 서글픈 직장생활에 대처하는 선배의 처세술이자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눈물겨운 타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때 마주한 ‘어른의 세계’는 슬프게도 그리 멋지지 않았다.

  

그렇게 지쳐갈 때,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번아웃 없이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발견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그 문구가 그렇게 반가웠던 걸 보면 아마 많이 소모되고 난 이후였던 것 같다. 카드뉴스 첫 장에는 손미나 작가님이 활짝 웃고 있었다. KBS 간판 아나운서에서 여행작가, 스타트업 CEO, 인생학교 교장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살기로 유명한 그녀의 책이라면 ‘내가 가는 길이 꽃길이다 2019’ ‘어느 날, 마음이 불행하다고 말했다 2020’ 매년 나오는 에세이를 챙겨볼 정도였다. 그 분과 행복하게 사는 법? 이거다!  


다음 장의 카드뉴스에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행복해지는 법을 찾는 분’으로 시작했고 맨 뒷장에는 3회, 12인내외 소규모라는 문구와 함께 참가비가 있었다. 45만원, 1회당 15만원인 셈이다. 1년반을 넘게 책방에서 일하고 있지만 지금봐도 여지껏 가장 비싼 프로그램이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마침 다가오고 있는 생일을 맞아 셀프 생일 선물이라는 빌미로 지체없이 신청했다. 돌이켜보면 그만큼 나의 고민이 깊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영등포에서 퇴근한 나는 2호선 영등포구청역으로 뛰어가 선릉역으로 향했다.


드디어 최인아책방에 첫 발을 들였다. 그 땐, 3층에 ‘혼자의 서재’가 있었다. 차분하고 따뜻한 인테리어로 집밖의 나만의 서재를 두는 컨셉으로 아늑한 공간이었다. 혼자서 고요히 사색하고 책 읽기 좋은 평온한 분위기에 푹신한 1인 소파가 창가를 향해 놓여 있었다. 안내에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원형으로 놓인 의자는 오는 순서대로 자리를 채워갔고 열자리가 모두 찰때쯤, 손미나 작가님이 등장했다.


어릴 때부터 동경해 오던 이를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열 명의 신청자와 작가님이 한자리에 모였다. 특이점은 이름과 나이로 시작하는 흔한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고 ‘지금 나의 상태는 번아웃일까?’ 묻는 설문지로 자가 진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때, 처음 알았다. 나를 잘 아는 사람보다 오히려 나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완벽한 타인에게야말로 더 과감하게 솔직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번아웃이라는 주제답게 스타트업 대표, 안과의사, 대구에서 올라온 기부단체 운영자, 산부인과 간호사 등 각자 자기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창업을 하다 공동 창업자과 어긋나고 직원들이 떠나면서 사람을 신뢰하기 힘들다거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지속 가능하고 의미있는 일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거나, 분만실에서의 작은 실수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는만큼 불안함을 떨칠 수 없다거나 저마다의 깊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암묵적인 규칙처럼 가감없이 솔직한 감정 표현은 결례이거나 부끄러운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일상 깊이 자리잡은 SNS는 멋진 순간 모음집마냥 아무도 절망에 대해, 실패에 대해, 삶의 고단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모두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이 연고 없는 사람들 앞에서 어디에서도 꺼낸 적 없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만 그런 것 같아 말 못하고 혼자 끙끙 앓던 고민들은 입밖으로 꺼내지는 순간부터 이미 치유가 시작된다. 동그랗게 둘러 앉아 자기일 마냥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주는 눈빛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편견없이 형성된 공감대는 끈끈하게 우리를 연결해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오길 잘했다, 싶었다.

  

연이어 혼자서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나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의 일대기를 한장에 담아보는 나의 인생 지도, 지금까지 나는 어떤 선택을 해 왔는지 되짚어보는 플러스와 마이너스 지표, 내 마음의 상처 의심지표, 어린 나에게 쓰는 편지, 나의 버킷 리스트 등 여러 방식으로 나를 돌아보고 현재를 진단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미 번아웃을 겪어낸 손미나 작가님이 일상 속에서 실제 실천하고 있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 방법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자문자답부터 직접 갈아먹는 건강음료의 과일채소 배합까지 나눌만큼 세세한 팁들까지 소탈하게 나누는 시간이었다.  


단 세번의 방문으로 내가 경험한 최인아책방은 어릴 때부터 동경해 오던 이를 처음 마주한 순간을 선물했고, 낯선 이 앞에서 한없이 진솔하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진정한 나를 마주할 기회를 주었다. 풀리지 않던 숙제같던 고민을 앞서 경험한 이의 지혜를 빌려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쌓인 공감대는 끈끈한 연대감이 이어지면서 귀한 인연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요즘은 다양한 커뮤니티와 플랫폼들이 늘어나면서 회사 밖에서도 여러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여전히 회사일에 치여 나를 돌보지 못하거나 외부 활동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는 나처럼 스스로 단조롭지 않은 일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건, 회사 밖으로 나오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나는 특히나 다른 직업 군의 사람들을 만나는 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과 같았다.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너무도 많다. 현생에 만족하는 이도, 지쳐 멀어져가고 있는 이도, 아무튼 바깥 세상을 경험해 보기를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일리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깥으로 걸음한다는 건 손 뻗을 수 있는 나의 선택지를 늘린다는 것이고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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