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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민 Oct 29. 2022

악어백이 필요 없는 어른이 될 거야


‘최인아 대표님, 실제로는 어때요?’ 


책방을 다닌 이후,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코로나가 극심해지던 시기, 책방은 온라인 동시 중계를 시작했다. 오프라인 모임 자체가 제한되는 상황에 맞춘 시대적 변화였다. 


문제는 장비인데 건물 자체 전기 배선으로 인한 음향 문제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것을 다룰 전문가가 없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장비를 마련하고 진행에 차질 없을 만큼의 조작법을 익혔다. 그럼에도 메인 스피커의 볼륨 조절이 안되거나 하울링으로 굉음이 난다거나 실시간 중계 직전에 갑자기 소리가 송출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불시의 위험이 도사렸다. 행사 직전이면 책방 식구 전원이 동원되어 사전 점검을 거쳐도 중계만 시작하면 말썽이 생겨 진을 빼곤 했다. 


그날은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 저자 북토크로 연사는 방송인 김제동 님과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이었다. 티켓을 오픈하자마자 순식간에 60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신청했으나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며 온라인으로 전격 전환했다. 출판사에서도 촬영 장비가 대거 들어오면서 영상은 별도 촬영하되 오디오는 마이크 중첩으로 인한 노이즈가 염려되니 책방에서 녹음한 파일을 쓰는 것을 제안했다. 


2시간가량의 인사이트 넘실대는 북토크가 끝나고 썰물 빠지듯 촬영 장비들과 사람들이 몰려나갔다. 그런데, 아뿔싸! 녹화 버튼을 안 눌렀다. 북토크 시작 전, 현장의 모든 것들을 점검하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고는 정작 녹화버튼 누르는 것을 새까맣게 잊었다. 재촬영은 물론 다른 외부 행사도 일절 잡혀있지 않아 책 이야기를 담을 단 한 번의 기회였다. 심지어 출판사는 책방의 요청으로 오디오를 담지 않았으니 대형사고였다. 


늦은 밤, 혼이 나간 채로 퇴근하며 떠오른 이 사실은 집으로 오는 내내 자책하게 만들었다. 8년 전 신입사원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사고를 뻥뻥 치던 때가 떠올랐다. 이 조마조마한 심장마저 똑같았다. 압박에 짓눌린 채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대표님을 찾아갔다. 상황 설명을 하고 너무 경황이 없어 녹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 즈음엔 생방송 울렁증처럼 매일 밤 행사로 인한 압박으로 악몽을 꾸던 시기였다. 하루는 꿈속에서 굉음을 듣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고, 하루는 행사 시작 직전 음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 전전긍긍 진땀을 빼며 눈을 떴다. 나름 혼신을 다해 애쓰는 와중에 야속하게도 사고는 터져버렸고 운을 떼면서도 쿵쾅거리는 심장과 동시에 설움이 몰려와 눈물이 찔끔 날 것만 같았다. 꾹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데 예상과 달리 대표님은 차분했다. 녹음본은 없는 거냐고 재차 확인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잘못이니 사과하고 이해를 구해야지. 내가 대표와 직접 통화할 테니 정민은 실무자와 컨택해 주세요. 다음부터는 잘 챙기시고!” 


어떠한 질책도, 말꼬리를 잡는 법도, 비난조도 없었다.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수습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웠다. 대표로서 책임질 수 있는 최대치를 행하고 직원에게 다음 단계를 제시했다. 경황없던 상황을 이해해주고 다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명확히 당부했다. 그 따뜻함이 어떠한 질책보다도 더 따끔했다.

 

이만큼의 대형 사고는 아니더라도 이 날 이후로도 책방 내외부로 사건사고들을 겪으며 대표님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사고가 나면 담당자가 말을 할 수 있는 사내 분위기여야 한다. 그러니 정민도 혹여 사고가 터지면 지체 없이 달려와 뭐든 알려달라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하겠노라고 하셨다. 대표가 그렇게 나온다면 직원의 마음은 성심을 다하겠노라 다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첫 번째 퇴사를 할 때, 사막 한가운데에서 바리케이드 하나 없이 폭격을 맞는 기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안다, 이렇게 본인이 나서서 책임지겠노라 말하는 어른의 근사함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성수동에서 외부 미팅이 잡혔다. 전날 밤, 내일 미팅을 떠올리며 나의 유일한 명품백을 꺼내 들었다. 서른을 기념하며 샀던 단 하나의 명품백이지만 평소엔 무거워 들지도 않았다. 중고시장에 내놓으려는 걸 친구가 극구 말려 마치 장식품처럼 방 한편에 놓여 있는 내 물건 중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내고 출근 채비를 서두르다 문득 책방 마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노트북이 들어갈까를 고민하며 가벼운 천가방을 산 다음날, 악어백을 들고 지나가는 여성을 보며 저 사람은 무슨 기준으로 저 가방을 골랐을까? 새삼스레 노트북의 무게가 느껴진 날이었다고 했다. 그 천가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북촌으로 미팅을 갔던 날, 고즈넉한 한옥에서 빛깔 좋고 탄탄하게 만들어진 천가방을 함께 골랐었다. 노트북이 들어갈까 크기를 가늠해보고 어깨에 둘러 무게를 재어보고 어깨끈이 두꺼우니 몸에 무리가 덜 갈 것이라며 구매를 결정했던 그 가방이다. 바로 이틀 전 함께 골랐기에 생생히 기억하는 장면이었다. 


자, 그렇다면 미팅을 간다고 평소 들지 않던 이 가방을 꺼낸 내 심정은 뭘까? 말끔하게 미팅에 가려고, 그 안엔 분명 상대가 나를 말끔하게 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었을 테다. 책방 마님이 악어가죽 백을 들지 않아서 어땠던가? 잠시 멈춰 생각했으나 되려 멋지다고 생각했다. 악어백 따위 없어도 멋진데, 그래서 더 멋진데?라고 말이다. 먼지를 닦던 손을 멈추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천가방만으로도 멋진 이유가 뭘까?


이유는 단순하다. 악어백으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최인아를 정의하는 건 그녀의 커리어지, 지금 얼마짜리 가방을 들고 있냐가 아니라 가능한 일이었다. 자, 백정민이 첫 미팅에 나타났다. 상대는 무엇을 볼까? 눈은 두 개가 제자리에 달렸는지, 용모는 말쑥한지. 그건 그 사람이 얕아서가 아니라 아직 그들에게 나에 대해 노출된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첫 만남에 나를 판단할 수 있는 게 그저, 그 순간엔 그게 전부라서.  


잠들기 전, 눈을 감고 되뇌었다.

악어백이 필요 없는 어른이 될 거야.

악어백이 필요 없는 어른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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