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은 대개 이별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익숙한 공기 속에서 몸을 떼는 순간, 발끝부터 스며드는 차가움은 마치 돌아오지 말라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모든 떠남이 상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떠남은 오래 머문 자리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숨 막히던 공기를 새롭게 순환시킨다. 그것은 낯선 풍경을 향한 여정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변화의 계기이기도 하다.
나는 머무는 법을 배우기 전에 떠나는 법부터 배웠다. 어린 시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자주 이사를 다녔다. 막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면 이미 다른 동네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문 너머의 나무는 해마다 같은 모양으로 잎을 틔웠지만, 바람의 결과 빛의 온도는 늘 달랐다. 그 차이를 느끼며 나는 떠남이란 매번 다른 ‘처음’을 선물한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배웠나 보다.
머무는 동안 변화는 아주 느린 속도로 스며든다. 익숙한 길목은 눈에 띄지 않게 변하고, 나 자신 역시 모르는 사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나 떠날 때는 변화가 한순간에 온몸을 가로지른다. 익숙한 풍경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그 찰나에, 머무는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온다. 마치 모든 것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 뚜렷해진다. 그것이 떠남이 남기는 가장 또렷한 선물이다.
떠나는 발걸음은 머무름의 시간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을 더 귀하게 빛나게 한다. 내가 발을 디뎠던 자리, 숨 쉬던 공기, 손끝에 스친 온기와 냄새들은 떠난 뒤에야 제 무게를 갖는다. 긴 겨울이 지난 뒤에야 봄빛의 따뜻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떠남은 그 따뜻함을 기억하게 만들고, 그 기억은 다시 새로운 기다림의 이유가 된다.
나는 언젠가 오래 기다리던 친구가 오지 않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있다. 발걸음은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미 그 기다림 속에서 충분히 단단해졌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떠남은 포기가 아니라 더 넓은 기다림으로 향하는 시작이었다. 머물며 지켜온 마음의 닻줄을 스스로 풀어내고, 아직 보지 못한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떠나는 동안에도 나는 머물렀던 자리의 바람과 빛을 품고 있었다. 그것들은 내 안에서 서서히 다른 모양의 씨앗이 되어 자랐다. 머무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면, 떠남은 바다처럼 나를 더 넓게 만들었다. 그 넓음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머무름의 자리를 찾고, 그곳에서 새로운 기다림을 품게 된다. 그렇게 삶은 기다림과 머무름과 떠남이 한 줄기로 이어진 강처럼 흘러간다.
강물은 한 곳에 오래 머물기도 하지만, 때로는 굽이돌아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난다. 그 긴 여정 속에서 한때의 머무름이 의미를 잃는 일은 없다. 오히려 굽이치며 흐르는 동안 강물은 머물렀던 자리에서 얻은 온기와 냄새를 품고 계속 나아간다. 나 역시 떠남 속에서 머물렀던 시간의 무게와 온도를 간직한 채 지금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 떠남을 두려워하던 시간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어질까 봐, 손에 쥔 것들이 흩어질까 봐 발을 떼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떠남이란 머무름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그 자리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떠난 뒤에야 보이는 풍경이 있고, 떠남이 아니면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종종 길 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자리를 돌아본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그 자리는 처음과 많은 부분이 다르다. 그곳에서 웃고 울던 나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순간마다 스며 있던 계절의 색과 냄새가 되살아난다. 그 기억은 나를 앞으로도 머무르게 할 힘이자 또다시 떠나게 할 용기이기도 하다.
결국 떠남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또 다른 모습이며, 머무름이 품고 있던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열쇠다. 나는 그 열쇠를 쥔 채 앞으로 걸어간다. 언젠가 다시 머물 자리에서 오늘의 떠남을 부드럽게 회상하고, 그 길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시작을 온 마음으로 맞이할 날을 믿으면서 말이다. 그 믿음이야말로 떠나는 발걸음을 지탱하는 가장 깊은 힘이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