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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순간의 힘

by 소향

삶을 돌아보면 커다란 사건보다도 자잘한 순간들이 더 깊은 자취를 남긴다. 특별한 날의 화려한 기억보다도 평범한 날의 작은 따뜻함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장면은 대개 소소한 순간들이다. 작은 순간이 모여 오늘을 만들고, 오늘의 연속이 모여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

햇살이 창가에 비치며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차 한 잔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는 여유, 뜻밖의 안부 전화 하나가 전해주는 따뜻함, 이런 순간들은 그 자체로는 미미해 보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마음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사소해 보이는 조각들이 모여 삶이라는 큰 그림이 완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바탕이 있어야 그림이 돋보이듯, 작은 순간들이야말로 인생을 빛나게 하는 배경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큰 행복을 찾아 나서지만, 정작 그 행복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오히려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일상의 틈새 속에 숨어 있다.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을 발견했을 때, 저녁 무렵 골목에서 풍겨오는 밥 냄새에 마음이 따뜻해졌을 때, 혹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어 주는 사람의 존재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위로, 이런 것들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 순간이 쌓이고 이어져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우정을 지켜주는 것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다. 생일을 기억해 주는 마음, 바쁜 중에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짧은 시간, 문득 건네는 안부 한마디,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서로를 묶어주는 매듭이 된다. 작은 순간에 깃든 진심이야말로 관계를 오래 이어주는 힘이다. 누군가의 곁에 오래 머무른 사람을 돌아보면 화려한 장식보다도 잔잔한 순간들을 함께 나눈 이들이 많다.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도 대개 작다. 병실 창가에 앉아 바람을 느낄 때, 오랜만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의 짧은 산책에서, 혹은 흘러나오는 오래된 노래 한 곡에서 눈물이 맺힐 때, 그 순간들은 우리의 하루를 더 귀하게 만들고 잊고 지냈던 삶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커다란 깨달음은 작은 순간의 반복 속에서 비로소 다가온다.

작은 순간을 소홀히 여길 때 삶은 텅 빈 껍질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큰 성취를 좇으며 작은 순간을 무시하면 눈앞의 삶은 사라지고 막연한 목표만 남는다. 그러나 목표에 다다른 뒤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는 결국 작은 순간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된다. 큰 성과는 그 결과 자체로 완전하게 성립될 수 없다. 그 속을 채우는 것은 순간순간의 따뜻함과 열정, 평범한 기쁨들이다.

작은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곧 삶에 대한 겸허함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알 때 순간들은 빛을 발한다. 누군가와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 잠시라도 고요히 쉴 수 있다는 것, 오늘 하루가 무사히 흘러갔다는 사실, 그것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선물이다. 순간을 알아차리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삶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삶은 거대한 점프가 아니라 작은 발걸음의 연속이다. 하루하루 쌓아가는 순간들이야말로 인생의 토대다. 모래알 같은 순간들이 모여 언덕을 이루고, 파도 같은 순간들이 이어져 바다가 된다. 순간을 무시하지 않고 소중히 품는 사람만이 넓고 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돌아보면 소중한 관계도 결국은 작은 순간들의 축적이었다. 오래된 친구와 나눈 짧은 웃음, 부모님과 함께한 소박한 식사, 아이가 건네는 서툰 그림 한 장, 그 모든 순간들이 쌓여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 언젠가 그 순간들이 지나가고 나면 비로소 그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음에 새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은 언제나 덧없고 순간은 늘 흘러간다. 그러나 흘러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작은 순간들은 기억 속에 쌓여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오늘의 작은 순간이 내일의 힘이 되고 그 힘이 모여 인생을 빚어낸다. 결국 한 사람의 삶이란, 크고 특별한 날들의 기록이 아니라,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순간들이 모여 이룬 조용한 한 폭의 풍경일 것이다.

작은 순간이 모여 만들어 낸 삶은 겉으로는 소박하게 보이겠지만 그 안은 충만하다. 화려하지 않아도 단단하고, 눈에 띄지 않아도 따뜻하다. 그러므로 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말아야 한다. 그 순간들이 쌓여 결국 나의 하루가 되고 나의 하루가 모여 나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삶은 결국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삶이며 그런 삶이야말로 다른 어떠한 삶 보다 가장 빛나는 인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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