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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르쳐 준 것들

by 소향

세월은 조용히 흐른다. 처음에는 그 흐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는 길고, 한 해는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많은 것들이 이미 멀리 흘러가 있다. 지나간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어제의 얼굴은 오늘과 다르다. 세월은 그렇게 조금씩 우리를 변화시킨다. 때로는 잔인하게, 때로는 은근하게, 그러나 결국은 삶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다가온다.

세월이 알려주는 첫 번째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것들도 시간 앞에서는 달라진다. 젊음은 서서히 늙음으로 바뀌고, 풍요로움은 소박함으로 변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은 늘 괴로움에 시달리지만,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음은 세월 속에서 한층 단단해진다. 꽃이 피어야 질 수 있고, 해가 떠야 저물 수 있다. 모든 변화를 자연스러운 이치로 받아들일 때 삶은 평온해진다.

세월은 또한 기다림의 가치를 알려준다. 급하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지만, 기다림 끝에 얻은 것은 깊이 뿌리내린다.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계절을 지나야 하듯, 사람의 삶도 시간이 쌓여야만 무르익는다. 서두름은 삶을 가볍게 만들고, 기다림은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세월은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하고, 기다림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든다.

세월은 또 비움의 필요를 알려준다. 손에 쥔 것을 끝내 놓지 않으려 할 때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결국 손을 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고, 놓아야만 얻을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세월은 끝내 보여준다. 집착을 내려놓은 뒤에야 새로운 길이 보이고, 미련을 흘려보낸 뒤에야 다시 걸음을 뗄 수 있다. 세월은 비움의 자리를 통해 삶이 넓어지고,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을 차분히 깨닫게 한다.

세월이 전해주는 또 다른 깨달음은 작은 순간의 소중함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은 큰 성취나 특별한 날이 아니다. 함께 웃었던 저녁 식사, 빗소리를 들으며 마주 앉아 있던 밤, 손끝에 전해지던 온기 같은 그런 순간들이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다. 세월은 크고 요란한 순간보다 사소하고 조용한 순간이 삶을 지탱하는 진짜 힘임을 보여준다.

세월은 또한 침묵의 가치를 일깨운다.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고, 소리보다 깊은 울림이 있다. 격한 언어는 시간 속에서 희미해지지만, 묵묵히 지켜준 침묵은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침묵 속에서 더 크게 다가오는 진실. 세월은 침묵을 두려움이 아니라 성숙으로 바꾸어 놓는다.

무엇보다 세월은 사랑의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사랑은 머무름 속에서 자라지만, 떠남과 그리움 속에서도 이어진다. 시간이 흘러도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이미 멀어진 사람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젖는 것도, 지나간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것도 모두 사랑이 남겨 놓은 흔적이다. 세월은 사랑이 사라지지 않음을 가르친다. 모양은 변해도 본질은 여전히 남는다.

세월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단단하게 만든다. 몸은 늙어가고 힘은 줄어들지만, 마음은 더 깊어지고 시선은 더 넓어진다. 젊은 날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고,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게 된다. 그것이 세월이 남겨 준 선물이다. 살아온 시간이 많아질수록 삶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지만, 그 무게를 견디는 법을 배우게 된다.

돌아보면 세월은 늘 잃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는 것이 더 많다. 지나간 것 속에서 남겨진 마음, 흘려보낸 것 속에서 남은 의미,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세월은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만들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오늘도 세월은 흐른다. 어제와 같은 풍경 같지만 오늘은 결코 어제와 같지 않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변하고, 배우고, 다시 살아간다. 언젠가 마지막에 다다를 때 세월이 남겨 준 가르침들은 우리를 끝까지 지탱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세월은 허망한 흐름이 아니라 삶을 단단하게 빚어낸 가장 큰 힘이었다는 사실이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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