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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려보낸 것들의 의미

by 소향

살아오면서 우리는 시간이 품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흘려보낸다.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붙들려해도 결국은 흘러가 버린다. 어린 날의 웃음도, 젊은 날의 열정도, 사랑하는 이와의 시간도 모두 세월 속에 흘러간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고 허무하지만 흘려보낸 것들이 남기는 자취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지나간 것들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 오늘의 자리를 완성해 준다.

흘려보낸 시간 속에서 배운 것들이 많다. 젊을 때는 무엇이든 움켜쥐려 했다. 기회도, 관계도, 감정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붙잡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강물은 흘러야 강물이 되고, 바람은 스쳐야 바람이 된다. 지나가야 할 것을 억지로 붙잡는 일은 결국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다. 흘려보내야 할 것을 흘려보낼 줄 아는 용기가 삶을 오히려 풍요롭게 한다.

흘려보낸 것들이 남긴 자취는 기억 속에서 더 빛난다. 학창 시절의 교실, 동네 골목, 오래된 책 냄새 같이 지나온 시간이 품은 것들이 그렇다. 그 모든 것들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 살아 있다. 그때는 소중함을 알지 못했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순간들이 귀한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흘려보냈기에 오히려 선명해진 것들이 있다. 손에서 떠나야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관계도 그렇다. 함께했던 사람들이 모두 곁에 머물러 주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떠나가고 어떤 이는 멀어진다. 그러나 흘려보낸 사람들과의 시간이 헛되었던 것은 아니다. 짧게 스쳐간 인연이라도 내 삶에 남긴 흔적은 분명히 있다. 그 흔적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된다. 흘려보낸 인연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다른 형태로 남아 있다. 떠나간 자리에는 빈틈이 생기지만 그 빈틈은 새로운 만남이 들어설 자리가 된다.

흘려보낸 감정도 의미가 있다. 지나간 슬픔이 있었기에 기쁨의 순간이 더 또렷이 다가오고,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이 있었기에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더 깊이 아낄 수 있다. 마음속에서 스쳐간 감정들은 모두 나를 가르쳤다. 흘려보냈기에 지금의 마음이 한층 단단해졌다.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며 다른 빛깔로 저장되는 것이다.

물론, 흘려보낸 것들 속에는 실패도 존재한다. 애써 쌓아 올린 것이 무너지고, 기대했던 결과가 헛되이 돌아간 경험처럼 말이다. 그 순간에는 아픔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실패 또한 흘려보낼 때 비로소 의미를 남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흘려보낸 실패 속에서 배운 끈기와 겸손은 쉽게 얻을 수 없는 보물이다. 실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퇴적층이 쌓여 화석을 이루는 것처럼, 삶의 깊이를 더하는 또 하나의 퇴적층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흘려보낸 것들을 후회하는 경우가 있다. 좀 더 붙잡았더라면, 더 애썼더라면 달라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따라온다. 그러나 흘려보낸 것이 있었기에 오늘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워진 자리에서 다시 걸음을 뗄 수 있었고, 놓친 길 옆에서 또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다 가질 수 없기에 삶은 균형을 이룬다. 흘려보낸 것은 어쩌면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쌓여 지금의 길을 완성했거나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흘려보내는 일은 결국 믿음과 닮아 있다. 사라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흘러가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손에서 떠나는 것을 담담히 바라본다. 붙잡지 못해도, 그 순간이 내 삶에 남긴 의미는 지워지지 않는다. 흘려보낸 것이 남긴 흔적은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다시 빛을 낸다.

삶은 흘려보낸 것들 위에 쌓여 있다. 남겨둔 것보다 흘려보낸 것들이 훨씬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떠난 것, 잃은 것, 놓친 것들이 모여 오늘의 얼굴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흘려보낸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흘려보낸 것들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고, 지금 내가 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늘도 우리는 무언가를 흘려보낸다. 짧은 한숨일 수도 있고, 지나가는 미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저편에 차곡차곡 퇴적되고 있다. 그런 퇴적된 날들을 언젠가 돌아볼 때 면, 흘려보낸 것들이야말로 내 삶을 가장 깊고 단단하게 만든 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삶은 붙잡은 것보다 흘려보낸 것들이 있어 우리들 삶은 더 의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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