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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자리

by 소향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희미해지는 듯 보이지만, 삶의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음이 힘들어 잠 못 이루는 밤에도,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바람에도,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조차도 뜻밖의 장면에서 되살아나 우리를 붙든다. 기억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기억은 눈물의 형태로 남는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 있다.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한 사람, 미처 건네지 못한 말 한마디와 같은 그 기억은 아픔으로 남아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눈물 속의 기억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그 슬픔 속에는 함께였던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다. 아파서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랑했기에 남는 것이다.

기억은 또한 웃음의 형태로 남는다. 별것 아닌 듯 지나갔던 순간이 세월이 흐른 뒤엔 빛나는 장면으로도 다가온다. 어린 시절의 장난, 젊은 날의 소소한 여행, 소박한 밥상 위의 웃음소리처럼 그 기억들은 오랜 세월을 건너도 여전히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삶이 고단할 때, 기억은 다시 살아갈 힘이 된다. 웃음으로 남은 기억은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기억은 사람을 이어준다. 오래 보지 못한 사람과 다시 마주할 때, 기억은 어색함을 지워 준다. 같은 시절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은 금세 가까워진다. 기억은 서로 다른 삶을 살던 이들을 다시 연결해 주는 다리다. 그렇게 기억은 관계를 이어 주고, 끊어진 듯한 시간의 틈을 메워 준다.

기억은 또한 우리 자신을 지탱한다. 나는 내가 가진 기억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의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나를 만든다. 기억은 과거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루는 토대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나 기억은 때로 무겁다. 떠올리기조차 힘든 장면들이 있다. 차라리 잊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기억은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조금씩 다른 빛깔로 변한다. 아픈 기억도 세월을 지나면 온전히 상처로만 남지 않고, 삶을 더 깊게 이해하게 하는 자리가 된다. 그래서 기억은 짐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선물이다.

기억은 세월과 함께 돌고 돈다. 한 번 흘려보낸 것들이 다른 장면에서 다시 돌아오고,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슬픔은 감사로, 그리움은 다짐으로,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변한다. 삶이 끝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기억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남을 경험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다른 이름으로 되찾는다.

삶을 돌아보면 결국 남는 것은 기억이다. 재산도, 명예도, 성취도 사라지지만, 기억만은 끝까지 우리 곁에 남는다.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으며 떠올릴 것은 분명 우리가 쌓아 온 기억일 것이다. 그 기억 속에서 우리는 살아왔음을 확인하고, 사랑했음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 곧 내일의 기억이 된다. 오늘 내가 웃는다면 그것은 내일의 위로가 되고, 오늘 내가 다정하다면 그것은 내일의 힘이 된다. 기억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쌓여 가는 것이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삶만이 언젠가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남긴다.

기억은 결국 마음의 자리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아 우리를 이끌어 준다. 아픔이든 기쁨이든, 그 모든 기억은 내 삶을 지탱하는 뿌리다. 오늘의 순간이 내일의 기억으로 남아 또 다른 날의 나를 지탱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삶의 마지막에 다다를 때, 내 안에 쌓여 있는 모든 기억은 하나의 빛이 되어 나를 품어 줄 것이다. 그러니 삶은 기억으로 이어지고, 기억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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