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악마를 보았다
내 인생 최악의 소시오패스
악마를 보았다.
그 사람은 현실판 악마였다.
50대에 160cm를 갓 넘는 키, 왜소한 체구에 느슨한 핏의 넥타이 없는 정장, 큰 머리를 더욱 부각하는 샤기컷, 마른 가지처럼 푸석푸석한 인상, 웃기라도 하면 얼굴 전체에 번데기처럼 번지던 주름 그리고 긴 치아와 1:1의 비율로 노출되던 잇몸. 그 사람을 만난 이후 그는 나에게 새로운 악마의 기준이 되었다.
그는 내가 근무하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팀의 일본 지사장이었다. 일본 거주 이력만 20년 가까이 되는 소위 '일본통'으로 불렸기에 회사의 일본 관련 모든 사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입으로만) 맡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기에 그가 전달하는 사항은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라도 '코드 레드'급의 긴급 사안으로 분류되어 최우선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mission'이었으며, 그 최전선에 우리 팀이 있었다.
그가 그러한 대우를 받는 데에는 특수한 배경이 있었다. 바로 대표이사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남다른 신분'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여느 일개 해외 지사장과는 비교 불가한 수준의 막강한 사내 권력을 공공연히 인정받으며 그 무도한 칼을 늘 무고한 직원들을 향해 노골적인 행패를 일삼는데 휘둘렀다.
머리가 나쁜 거 아닙니까?
여느 출근일과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간밤에 쌓여있을 업무 이메일에 대한 걱정 그리고 또 어떤 스펙터클한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두려움으로 물 한잔 마실 겨를 없이 사내 메일에 접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가 나쁜 거 아닙니까'라는 제목의 읽지 않는 메일이 클릭을 종용하듯 볼드체로 강조되어있다. 또 다른 시작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순서에 차이만 있을 뿐 그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3개월 인턴직원부터 부장급까지 직급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이메일 하나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그것도 수년간 괴롭혀왔다.
메일 한통만 본다면 "뭐 좀 무례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악마랄 것 까지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그런데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그런 메일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 몇 년간 지속적으로 보내며 아주 조금씩 조금씩 상대의 인격을 끌어내리고 영혼을 좀 먹는다는 것이며 둘째 그러한 이유 없는 '공개처형'에 늘 대거 C.C.(수신 참조)라는 관중을 동원시켜 당사자의 수치심을 최고치로 느끼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이번 메일 역시도 그랬다. 엄연히 팀원을 8명이나 거느린 부장급 팀장에게 극악무도한 메일을 보내며 수신 참조에 전 팀원은 물론 심지어 대표이사까지 포함시켰다.
'미친 새끼..'
누가 보면 그런 말을 들어도 될 만큼 - 그런 말을 들어도 될 자격이란 없지만- 팀장이 엄청나게 큰 업무상의 실수를 한 줄 오해할만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회사를 다녀보면 알겠지만 보고의 연속으로 구성된 시스템 속에서 독단적인 업무 수행이나 결정으로 회사에 치명상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격모독의 발단은 대부분 지극히 주관적인 '탐탁지 않음'에 있었다.
이번 메일 역시 자신의 요청 사항에 대한 팀장이 제시한 피드백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가 원인이었다.
0 과장, 일본어 학원 다니세요.
라는 공개처형 메일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불쾌함보다는 어리둥절함이 더 컸더랬다. 팀장도 저런 험한 꼴을 수시로 당하는데 일개 과장인 나라고 별수 있냐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문제로 삼는 내용이 당시에는(!!) 가뿐히 '무시해도 될 만큼'의 '너무 별거 아닌' 사안이라 오히려 웃음마저 나왔다. 일본 본사와 (당연히) 일본어로 소통하며 아무 문제없이 업무를 추진 중인 실무 과장에게 난데없는 '일본어 문법 지적이라니!'
대응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눼눼.. 다음부터는 표현에 주의하겠습니다!
별거 아닌 일에 별거 아닌 것처럼 대응하며 넉살 좋은 직원 코스프레를 했던 게 실수였다.
그는 그런 나의 첫 반응에 '탐탁지 않음'을 느낀 이후부터 나를 사냥감을 몰듯 궁지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내 계정으로 발신되는 거의 대부분의 일본어 이메일에 대해 공개적인 망신주기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또 틀렸네", "이거 이렇게 쓰는 게 맞는데", "일본어 다시 배워야겠네" 라며 일본어 업무 경력이 자그마치 8년 이 넘는 나를 팀원들 앞에서 보란 듯이 끌어내렸다. 광기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왜 나의 이메일과 일본어 문법에 이토록 집착을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직속 차장, 팀장 심지어 임원까지 찾아가 '살려달라' 호소하기에 이르렀지만 그의 악행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런 액션을 취했다는 사실은 거의 실시간으로 그에게 전해졌고 그때는 단순히 문법 지적이 아닌 내가 담당하는 업무 진행에 중요한 차질을 초래하는 것으로 더 잔인한 보복을 해왔다.
예를 들면 업무상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게는 카카오톡 전화로 '승인'을 해 주고는 그 결정에 따라 업무를 진행하는 중에 느닷없이 이메일로 '내 결정 없이 업무를 함부로 처리했다'는 죄목을 씌어 또다시 공개 처형을 시키는 방식이었다. 억울하고 기가 막혀 따지고 들면 "내가 언제요? 나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일본어 문법도 완벽하지 않은 하등 무능력한 인간!!'
호기롭게 '별거 아니네'라고 자신했던 처음의 나라는 존재는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극심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하루하루 몸과 마음은 병들어갔다. 담당 업무를 책임 있게 수행했고 나름의 성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일본어 문법 하나 완벽하지 않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 앞에서 늘 무너졌다.
만약 그가 이런 상황까지 다분히 의도한 것이라면 나 같은 '인간' 따위가 그를 이겨먹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담보 잡힌 가엾은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끝 간데없는 무기력의 늪으로 빠졌고, 그로 인해 완벽하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생각을 하면 안 됐다. 혹시라도 제정신이 들어 자의식의 눈을 뜨기라도 하면 고층 빌딩의 창 밖을 내다보며 '뛰어내릴까?'를 고민했다.
그만두겠습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하고 좋게 가자"라고 돼먹지 않은 조언을 하던 사람들은 퇴사를 극구 만류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죄송하다고 해야 하죠?
아니, 원래 그런 인간이잖아. 알면서도 그냥 버티는 거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악마라는 사실을.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악마 같은 인간 하나 때문에 누구는 원형탈모에 시달리고, 누구는 정신병원에 다니고 또 누구는 업무 중에 졸도를 해서 119에 실려가는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세계에서 버젓이 일어났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희생양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할 뿐 동료가 겪은 일에는 '모르는 척'으로 일관했다.
누구도 그를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조차도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지 않은 탓에 "잘 좀 하지 그랬어"라는 핀잔으로 그의 악행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바빴다.
하나같이 '문제'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문제화되는 것이 두려워 '문제'를 방치했다.
더 일찍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내 소중한 인생을 그렇게 낭비해서는 안 되는 거였지만 '갑질'이라는 표현조차 없던 당시만 해도 나는 '회사 생활하면 으레 있을 법한 일(?)' 하나 견디지 못하는 명백한 '루저'였다. 하지만 알량한 회사원 타이틀과 월급을 담보로 포식자를 피해 매일같이 몸을 숨기는 톰슨가젤처럼 불안한 삶을 연명할 수는 없었다.
나는 선택했다. 내 인생을 지키는 루저가 되기로.
이미 수년 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그와 비슷한 외모나 음성 또는 TV에서 거론되는 숱한 이름 중에 한 두 음절이라도 그의 이름과 겹칠지라면 흠칫 놀라곤 한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먼 미래에 과학기술이 발전해 이런 불행한 기억을 손쉽게 삭제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는 한, 몇 년의 세월이 흘러도 아직도 완벽하게 지워지지도 그렇다고 희미해지지도 않는 내 인생 최악의 악마에 대한 기억과 공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내 안의 상처로 꽁꽁 숨기는 것이 아닌 이렇게 글로나마 세상에 공개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